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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 서문,

그날,나는 무엇을 몰랐을까

by 아르칸테

전문가들의 해석 속에 갇히다


라면 한 봉지에서 시작된 작은 파문은
이제 더 이상
아이와 라면가게 사장님 사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사건은
집 안을 흔들었고,
학교를 통과했고,
이제는
전문가라는 이름을 가진 어른들의 방까지
도착해 있었다.

각자의 전문 지식,
각자의 언어,
각자의 확신을 들고 온 어른들은
모두 아이를 도우려 했다.
그 마음이 거짓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마음의 문제는
모두가 아이를 ‘도우려고’ 했지,
아이를 ‘들어보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심리상담사는
아이가 가진 상처의 지도를 꺼내 들었다.
결핍, 애착, 자존감이라는 단어들이
아직 아이의 마음에 있지도 않은 상처를
미리 설명하고 있었다.

신경과학자인 삼춘은
뇌의 미성숙을 들었다.
전두엽, 충동 조절, 발달 단계
마치 아이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부품’처럼
설명되었다.

동물행동학자인 엄마 친구는
배고픔을 본능이라 했다.
도덕보다 더 오래된 생존의 언어로
아이의 행동을 다시 해석했다.

사업가 아저씨는
결핍에서 시작되는 두 갈래의 길을 말했다.
범죄인지, 성공인지
아이의 행동은
어느 쪽에서도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모두 다르지만,
이 네 사람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아이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프레임으로 아이를 ‘번역’하고 있었다.

그 번역은
정교했고,
근거가 있었고,
논리적이었다.

그러나 그 번역 과정에서
아이의 원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희미해지고,
사라져갔다.

심리학의 언어로 번역된 아이,
뇌과학의 언어로 번역된 아이,
본능의 언어로 번역된 아이,
성공과 실패의 언어로 번역된 아이

그 어느 곳에도
‘그날의 아이’는 없었다.

아이의 속마음은
조용히, 그러나 깊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왜 나를 설명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점점 더 나를 모르게 되는 걸까?”

2막은 바로 그 시간이다.
어른들의 선의가 오히려 아이를 묶고,
전문가들의 확신이 오히려 아이를 더 잃게 만드는 시간.

여기서 아이는 다시 질문한다.

“그날, 나는 정말
무엇을 몰랐던 걸까?”

그리고 이 질문은
이제 단순한 궁금증이 아니라,
아이 자신을 되찾기 위한
첫 번째 발버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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