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나는 무엇을 몰랐을까
“선생님… 잠시… 얘기 좀…”
담임은 출석부를 정리하다
고개를 들어 아이를 보았다.
안경 너머의 눈빛은
늘 그랬듯 정확하고, 차갑진 않지만
언제나 ‘정답’을 찾는 시선이었다.
“무슨 일이니?”
그 말투는 친절했지만,
이미 상황을 판단하려는
선생님의 오래된 습관이 스며 있었다.
아이는 머뭇거리며 입술을 적셨다.
“…어제… 일이요.
저… 그 라면… 그러니까…”
말을 꺼내는 순간
복도에서 들리던 규칙의 목소리가
꿈처럼 다시 귓가에 스쳤다.
‘이유는 없어.’
‘규칙이 먼저야.’
아이의 어깨가 한순간 움츠러들었다.
선생님은 출석부를 덮으며 말했다.조금 놀란 듯 아이를 보았다.
“아 무슨일이니 고민있어?”그말투는 다정했지만 문제를 들으려는 다정함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려는 다정함에 가까웠다.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아이에게는 완전히 다른 감정으로 다가왔다.그리고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이는 어제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조각조각 이어붙이기 시작했다.
라면 봉지를 집어 든 순간,사장님의 눈빛,부모의 화난 얼굴,엄마의 눈물,
그리고 악몽처럼 엉켜 떠오른 모든 장면들.그러나 이야기가 절반쯤 나올 때쯤,
선생님은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 마찰음이
아이에게는 심장이 조여오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어떤 이유였든 간에,
그건 하면 안 되는 행동이야.”
그 문장은
질문이 아닌 ‘판정’처럼
아이 앞에 먼저 내려와 있었다.
마치 결론이 이미 정해진 시험지처럼.
아이의 목소리는 갈라지듯 흔들렸다.
“…근데요, 선생님…
왜… 안 되는 건지… 전… 잘…”
선생님은 아이의 말을 듣는 듯했지만,
정작 그 끝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이의 문장이 절반밖에 나오지 않은 그 지점에서
또 하나의 ‘정답’이 내려왔다.
“규칙은 왜 지켜야 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주 기본적인 거야.
남의 물건을 가져오면 안 된다는 건
이유를 묻기 전에 알아야 하는 거지.”
말투는 친절했지만,
그 친절은 경우를 살피기 위한 친절이 아니라,
정답을 알려주기 위한 친절이었다.
문제를 들으려는 태도는 없었다.
문제의 맥락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었다.
오직 ‘틀림’을 확인하려는 눈빛뿐이었다.
아이의 가슴속 어딘가에서
작은 금이 낫다.
“그럼…
배고픈 것도…
몰랐던 것도…
이유가 아닌 건가요…?”
그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마치 자기 발밑으로 곧바로 떨어져
바닥에 스며드는 것처럼 들렸다.
선생님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 사정이 있었던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규칙이 달라질 순 없단다.
배고팠어도, 몰랐어도,
그건 잘못된 행동이야.
이건 아주 단순한 문제야.”
단순
그 단어가
아이의 마음 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단순하지 않은 건
아이의 삶이었는데.
단순하지 않은 건
어제의 배고픔이었고,
모르고 저지른 행동에 대한
그 어린 마음의 혼란이었는데.
선생님의 마지막 말은
대화를 닫는 열쇠처럼 또각 소리를 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하자.
규칙은 이유보다 먼저 지켜야 하는 거야.”
아이의 속마음은
마치 방에 가득 찬 먼지처럼
흩어지지 않고 떠돌았다.
“…선생님,
전 진짜 물어보고 싶었어요.
왜요…?
왜, 이유는 항상 나중인가요…?”
그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왜냐하면 선생님은
문제의 ‘이유’를 듣기 전에
문제의 ‘정답’을 먼저 꺼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아이가 몰랐던 것은
규칙이 아니라
누구에게 무엇을 말해야
사람이 ‘일단 들어주는 존재’가 되는지를
아직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a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
아이의 시선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 틈 사이로 자신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선생님이 의자를 조금 더 아이 쪽으로 당겼다.
이번엔 마찰음이 아니라
부드럽게 조심스러운 소리였다.
“그래도…
많이 놀랐겠다, 그치?”
그 말은 분명
‘공감’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투엔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온도보다는
“이제 진정하고 넘어가자”는
약한 봉합의 기색이 더 짙었다.
선생님은 아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다음엔…
선생님한테 먼저 와서 말해.
그러면 이런 일 안 생겨.”
그 말은 위로처럼 들렸지만,
실은
“네가 말만 잘했으면 문제 안 생겼다”는 뜻처럼
살짝 비틀린 위로였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끄덕임에는 동의가 아니라
그저 더는 말할 수 없게 된 마음이
고요히 접혀 있었다.
선생님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너 착한 애인 건 선생님도 알아.
다만… 규칙을 지키는 습관이 더 필요하단 거지.”
그 말은
달콤한 캔디처럼 보였지만,
씹을수록 입안을 마르게 하는
얇은 설탕막 같은 말이었다.
포근함이 아니라
형식의 포장지였다.
아이의 심장 언저리에서
작은 금이 또 하나 났다.
아이의 속마음:
“…공감해 주는 것처럼 말하지만…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반쯤만 들은 것 같아…
나머지 반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마음 편히 하고.
이 일은 여기서 끝낸 걸로 하자.
알겠지?”
아이의 대답은
작고 얇게 떨어졌다.
“…네.”
하지만 아이의 가슴 어딘가에서는
이 대화가 끝나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은 공감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공감은
아이의 슬픔을 품어주는 공감이 아니라,
상황을 정리하기 위한 공감의 ‘흉내’였다는 것을
아이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날 아이가 몰랐던 것은
규칙도, 행동의 옳고 그름도 아니었다.
‘진짜 공감’은
내 말을 다 듣고,
그다음에 판단하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아직
아무도 아이에게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날 아이가 몰랐던 것은
규칙도, 행동의 옳고 그름도 아니었다.
‘진짜 공감’은
내 말을 다 듣고,
그다음에 판단하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아직
아무도 아이에게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선생님은 아이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린 뒤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제 자리로 돌아가자.”
아이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문을 열고
아이를 먼저 내보낸 뒤
마지막으로 조용히 문을 닫았다.
찰칵.
문이 닫히는 소리는
아이의 뒷모습을 밀어내는
작은 바람 같았다.
아이는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떼었지만
마음은 교무실 문틀에 걸려 있는 것처럼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문 너머에서
구겨지지 않은, 너무나 밝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자기야! 나 방금 진짜 웃긴 일 있었어.
아니, 어떤 애가 어제 라면을… 응응, 맞아 그거!
아니, 괜찮아졌어~ 그냥 애들 실수지 뭐~ 하하…”
선생님의 말투는
지금 막 아이에게 했던 조심스러운 목소리와
전혀 다른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밝고, 가벼워서
방금 전까지 아이의 고민을 듣던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아이의 발걸음이
복도 한가운데에서 멈췄다.
문에 기대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니, 내가 달래주느라 힘들었어~
요즘 일도 많고~ 자기 보고 싶다니까!”
웃음소리.
장난스러운 투정.
따뜻한 말들.
모두 선생님과 ‘누군가’의 이야기였고,
그 안에서
아이는 잠깐 등장했다가 바로 사라지는
하나의 소품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아이의 속마음은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굳어갔다.
“…선생님에게 나는…
잠깐 지나가는 에피소드였구나…”
교실로 돌아오는 길은
아까보다 더 길었다.
햇빛은 그대로 교실 창을 비추고 있었지만,
아이에게 그 빛은
조금도 따뜻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뿐이었다.
교실로 돌아가는 복도는
유난히 길어 보였다.
발걸음을 떼는 데에도 힘이 들어갔고,
b
아까 선생님과 나눈 대화가
마치 가방 속에 돌처럼 들어앉아
걸음을 느리게 만드는 듯했다.
그때였다.
바닥 위에
작은 과자 조각 하나가 굴러다니는 것이
아이의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쉬는 시간에 떨어뜨렸을,
별 의미 없는 부스러기 하나.
그런데 그 주변에
개미들이 모여 있었다.
세 마리, 네 마리, 다섯 마리…
작디작은 다리들이
자기 몸집보다 큰 과자 조각을
부서지지 않게 조심스레 들어 올리고 있었다.
아이는 발걸음을 멈췄다.
개미들이 작은 줄처럼 이어져
조각 하나를 목적지로 옮기는 모습은
희한하게도 아이 가슴 안쪽을 찌르는 무엇과 닮아 있었다.
개미들은 말이 없었다.
판단도, 꾸중도 없었다.
서열도, 누가 잘못했다는 말도 없었다.
단지
한 조각의 무게를
함께 나르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그 모습을 보며
문뜩 이런 생각이 스쳤다.
“저 개미들은…
누가 왜 떨어뜨렸는지 따지지도 않고,
잘못이라고 말하지도 않네…”
개미들은
과자가 어떻게 거기에 놓였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걸 문제 삼지 않았다.
이유를 먼저 묻지 않았다.
규칙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이의 가슴 안에서
조금 전 선생님이 말했던
‘단순한 문제야’라는 말이
또다시 불편하게 일렁였다.
“단순한 게 뭘까…
정말 단순한 건…
지금 내 앞에 있는 걸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닐까…”
개미들은
조각을 떨어뜨린 아이를 찾아
혼내려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따져 묻지도 않았다.
아이의 마음에
묵직한 깨달음 같은 것이
아주 작은 씨앗처럼 떨어져 내려앉았다.
“이유를 묻지 않는 건…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서일 수도 있구나…”
개미들은
조각을 조금씩 조금씩 옮겨가며
복도 구석으로 사라졌다.
아이의 눈에
그 작은 줄이
어딘가 짠하게 느껴졌다.
아이는 작은 숨을 들이쉬며 속으로 말했다.
“…나는…
왜 모든 게 이렇게 어렵게 느껴질까…”
그리고
무겁지만 조금은 새로운 마음으로
교실 문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이는 개미들이 사라진 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 작은 생명들이 남긴
아주 얇은 흔적조차
아이 마음 속에서는
묘하게 오래 울렸다.
“…나는 왜 이렇게 복잡할까.
개미들은 그냥 움직이면 되는데…”
아이의 그런 생각을 알아차린 사람은
복도 어디에도 없었다.
지나가는 친구들은
개미 따위는 보지도 않았고,
아이가 멈춰 서 있는 이유에도
아무 관심이 없었다.
교실 문 앞에 다다르자
그제야 담임 선생님이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야.
상담 선생님이 너 좀 보자고 하시네.”
아이는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의 표정에는
아까의 진지함도,
전화통화 속 밝은 웃음도 없었다.
그저
“문제가 발생했으니
해당 절차대로 다음 단계로 보내는”
그 익숙한 행정적 표정.
마치,
교무실에서 종이를 넘기듯
아이는 ‘다음 칸’으로 넘겨졌다.
아이는 천천히 걸음을 돌려
상담실 방향으로 향했다.
머릿속에선
개미들이 옮기던 과자 조각이
아직도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상담실 문 앞에 다다르자
문에 붙은 작은 표지판이 보였다.
학교 상담실 – 마음을 듣는 곳
그 문구를 본 순간,
아이의 가슴 속에서
아주 가느다란 기대가 일어났다.
‘마음을… 듣는다…’
지금까지
아무도 완전히 들어주지 않았던 말들,
선생님조차 절반만 듣고
결론부터 말했던 이야기들…
여기서는
정말로 누군가
끝까지 들어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
아이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