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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부모

그날,나는 무엇을 몰랐을까

by 아르칸테


사장의 목소리가 가라앉기도 전에
현관 밖에서 급히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짧고 날카로운, 누군가의 숨이 섞인 소리였다.

문이 또 한 번 열렸다.

이번엔 바람보다 더 무거운 공기가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우리 애가… 여기 있다고 해서…!”

엄마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신발도 제대로 벗지 못한 채
바지 끝이 흙먼지로 젖어 있었다.
불안과 분노와 죄책감이 한꺼번에 섞인 얼굴이었다.

엄마는 아이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아이를 뒤로 감쌌다.
마치 뒤늦게 발견한 위험에서
세상을 통째로 떼어내려는 듯한 자세.

“우리 아이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요.
배가 고파서… 그냥 순간적으로…!”

엄마의 말은 빠르게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속도에는
아이에게 무엇이 있었는지 묻는 ‘여지’가 없었다.
아이의 마음을 들을 공간보다,
자신의 불안과 책임을 덮는 말들이 더 빨랐다.

아이는 엄마의 등 뒤로 숨겨진 채
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아이의 속마음
“어… 엄마.
내가 뭘 느꼈는지…
한 번도 안 물어봐….”

사장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어붙였다.
“어머니, 제가 다 봤어요.
라면을 들고 그냥 나가려고 했습니다.”

엄마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해요. 우리 애가… 아직 어려서 생각이 없어요.”

그 말은 사과처럼 보였지만
실은 아이의 마음을 대신 규정하는 선언이었다.
‘너는 아직 생각이 없다.’
그 말은 부드러웠지만
실은 아이의 판단을 가장 조용하고 확실하게 지워버리는 방식이었다.

“나는… 생각이 없는 아이인가? 생각이 없으면 용서가 되는건가?

근데…나, 정말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닌데..”

아이는 엄마의 옷자락을 잡으며
작게 입술을 떨었다.
그러나 그 떨림은 엄마에게 도달하지 않았다.

아빠는 뒤늦게 도착했다.
걸음은 빠르지 않았지만,
표정은 이미 결론을 정해놓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너 때문에 우리가 욕먹는다.”

그 말은
아이의 실수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아빠 자신의 체면이 깎인 충격에 대한 외침이었다.

“동네에서 우리 가족 뭐라고 하겠어?
부모가 뭐 가르쳤길래 이 모양이냐고!
창피하게…”

엄마는 아빠를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당신, 애 앞에서 왜 그래. 아직 어린애야.”

그러나 그 말 역시
아이가 어린애라는 이유로
어른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야 한다는 선언에 지나지 않았다.

아빠는 씁쓸하게 코를 훅 뿜으며 말하였다.
“어린애면 더 잘 가르쳐야지.
지금 이걸 바로잡지 않으면
나중엔 큰일 난다니까.”

사장은 크게 끄덕였다.
“맞아요. 지금 혼나야죠.
요즘 부모들은 애를 너무 믿어.”

그 순간, 세 명의 어른의 시선이
동시에 아이에게 꽂혔다.

그 시선은
관찰이 아니라 확신이었고,
궁금함이 아니라 판단이었다.

아이의 마음은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

아이의 속마음
“나를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어떻게…
내 마음을 말해야 하지…?”

아빠는 사장을 향해 되물었다.
“돈이 모자란 거면 제가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는 듯,
얼굴에는 정의감을 가장한 우월감이 번졌다.

“돈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건 가르쳐야 해요.
규칙이 있어야 세상이 돌아가는 거니까.”

아빠는 그 말을 들으며
자신이 지켜야 할 체면과 정의가
갑자기 무거운 돌처럼 느껴진 듯
아이를 향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왜 그랬어?
왜 말을 안 하고 그냥 가져왔어!”

아이의 입술이 떨렸다.
목구멍은 잠겨 있었고,
울음도,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이의 속마음
“아빠…
나도 말하고 싶었어…
근데… 너무 무서웠어…”

엄마는 그 떨림을
두려움이 아니라 ‘죄책감’으로 해석하며
더 세게 아이를 감싸 안았다.

“울지 마.
엄마가 다 해결할게.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그러나 그 말은
아이의 마음을 듣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사장은 양팔을 다시 끼며 말했다.
“보세요.
부모가 애를 너무 감싸니까
애가 말을 못 하는 겁니다.
솔직하게 잘못했다고 하면 되는 걸…”

아빠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아이는


a

한 번도 묻지 않은 질문을

또 한 번 속으로만 삼켰다.

아이의 속마음
“내가
정말 나쁜 아이여서…
말을 못 하는 걸까…?
아니면…
어른들이 너무 큰 목소리로
내 마음을 덮어버린 걸까…?”

가게 안 공기는
어른들의 도덕과 체면으로 점점 무거워졌다.

라면 봉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아이의 마음에서도
따뜻함은 거의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작은 불씨처럼 남아 있는 문장 하나가
계속 속삭였다.

아이의 속마음
“다들 나에 대해 말하는데…
왜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을까…?”


사장은 이제 일이 거의 끝났다는 듯
숨을 길게 내쉬고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 소리는 마치
“이제 결론 내려도 되지?”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여튼, 이번엔 그냥 넘어갈게요.
부모님도 와 계시니까.
근데 다시는 이런 일 있으면 안 됩니다.”

그 말 한 줄에는
‘나는 너희 가정을 제대로 가르쳤다’는
얇지만 강한 승리감이 깔려 있었다.

아빠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잘 가르치겠습니다.”

그 말은 아이를 향한 것이 아니라
사장의 판단을 인정해주는
하향식 고개 숙임이었다.

엄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수치심과 분노, 억울함이 뒤섞였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말해도
아빠나 사장에게 흘러가지 않을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사장은 팔을 한 번 더 끼며
아이에게 마지막 말을 던졌다.

“알겠지?
이게 어른들이 말하는 규칙이야.”

아이는 고개를 아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나 그 끄덕임은
이해의 표시가 아니라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움직임이었다.

엄마는 아이의 손을 잡아
조용히 데리고 나왔다.
아빠도 뒤따라 나와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순간,
가게 안에 남아 있던 ‘어른들의 정의’는
마치 먼지처럼 흔들려 떨어졌다.

가게 밖의 공기는 차가웠다.
아이는 숨을 들이켰다.
조금 전까지 눌려 있던 공기보다
훨씬 가벼워야 했지만
왜인지 더 무겁게 느껴졌다.

엄마는 걸음을 재촉하며 말했다.
“당신 때문에 우리 아이가 사람들 앞에서 무슨 꼴이야!”

아빠는 곧장 반발했다.
“내가 뭘? 내가 잘못했다고?
애가 잘못했으니까 혼난 거잖아.”

엄마, 더 크게.
“아니, 왜 애 앞에서 체면 타령을 해?
라면 하나 갖고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굴고!”

아빠, 더 날카롭게.
“당신은 애를 너무 감싸니까 문제야!
저 사장님 말 못 들었어?
말이 안 되니까 말을 못 하잖아!”

엄마는 걸음을 멈추고
아이를 앞으로 살짝 밀며 말했다.

“아이는… 말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말할 틈을 못 받은 거야.”


b

그 말은 날카로웠지만
또 다른 오해를 품고 있었다.
‘말할 틈’이 없었던 건 사실이지만
아이가 정말 원하는 건
누가 대신 해석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스스로 말할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강아지 울음소리

아이는 짖고있는 강아지를 보며

“나도 저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 사실을 두 사람 모두 알지 못했다.

아빠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은 모르는 소리 좀 그만해.
부모가 책임지려면 정확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엄마는 손을 덜덜 떨며 말했다.
“그게 가르치는 거야?
아이 기 죽이고, 죄인 만들고?
당신은 늘 체면만 챙겨!”

아빠의 얼굴이 붉어졌다.
“체면은 중요하지!
애가 무슨 사람 되겠어, 그렇게 키우면!”

그들은 서로에게 소리쳤지만
정작 아이에게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엄마는 아이를 보호하려 했지만
아이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 아니었고,
아빠는 규칙을 가르치려 했지만
아이의 공포를 들여다볼 줄 몰랐다.

그 모습은 마치 하나의 먹잇감을 두고 다투는 짐승들처럼 정작 그 먹잇감이 느끼는

두려움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장면 같았다.

둘의 싸움 사이에 서서
아이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걷고 있었다.

아이의 속마음
“…나는
어른들이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왜 아무도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는 묻지 않을까…”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아이는 말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어른들의

다툼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싸움이 끝난뒤 그 자리를 차지한 ‘승리한 어른의 말’을 그대로 따라야 할 뿐이었다.

가로등 아래로 세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불빛보다 더 흔들린 건
아이의 작은 발걸음이었다.

라면 봉지는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의 마음 한 구석엔
아직 꺼지지 않은 물음 하나가 남아 있었다.

아이의 속마음
“나는…
정말 나쁜 아이가 맞을까…
아니면…
오늘 어른들이 너무 무서웠던 걸까…?”

“내가 저지른 잘못 하나가 정말 이렇게 큰일이었을까…

나는 도대체 얼마나 나쁜 아이인 걸까…”

아이는 자신이 벌인 작은 실수가 마치 세상의 모든 규칙을 무너뜨린 죄처럼 느껴졌다.

그 파장은 아이의 마음을 갈가먹으며 잘못 보다 더 깊은 곳

‘존재’를 흔들어놓고 있었다.


세 사람의 그림자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흔들리면서도
끝내 한 점으로 겹쳐졌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가장 먼저 고개를 들었다.

아빠는 마지막 말을
마치 결론을 내려주는 재판관처럼 뱉었다.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해라.
알겠지?
이제부터 네가 뭘 해야 하는지 기억해라.”

그 말은
사건의 마무리가 아니라
아이에게 주어진 ‘승리자의 언어’였다.
사건의 정의는 이미 끝났고
아빠의 말은
아이에게 선택지가 없는 ‘판결문’처럼 떨어졌다.

아이의 속마음
“…그 말이
정말 옳아서가 아니라…
그냥… 어른이니까 맞는 걸까…?”

그러나 아이에게 묻는 사람은 없었다.

엄마가 그 순간
아이의 손을 붙잡아 끌어안았다.
참아왔던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우리 애… 얼마나 놀랐을까…
다시는 그러지 마… 제발…
엄마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그 울음에는
아이의 마음을 향한 공감보다
엄마 자신의 불안과 죄책감을 달래기 위한 울음이 먼저였다.
그녀의 떨린 목소리는
아이의 상처가 아니라
자신의 체면이 무너진 공포를 감싸기 위한
방어기제였다.

하지만 엄마는 그 감정을
‘사랑’이라는 따뜻한 천으로 감싸
부드럽게 건넸다.

“엄마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그러니까 이런 일… 다시는 하지 마…
엄마 마음 아프게 하지 마…”

그 말은 다정했지만
그 다정함 속엔
아이의 마음보다
엄마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는 간절함이 더 짙게 묻어 있었다.

아이는 엄마의 품 속에서
작게 눈을 감았다.
안기는 순간조차
따뜻함보다는 혼란이 먼저 찾아왔다.



c
“엄마가 우는 건…
내 마음 때문일까…
아니면…
엄마가 더 무서웠던 걸까…?”

“나 때문에 이렇게 울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얼마나 큰 잘못을 한 걸까…

아빠는 화를 내고..엄마는 이렇게 울고 나는 도대체 무엇을 그렇게 망친 걸까..”

두 어른 사이에 끼인 채
아이는 또다시 조용히 결론을 삼켰다.

그날 밤,
아이에게 주어진 마지막 문장은
어른들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승리자의 언어였고,
아이는 그 언어를 따라야만
가정의 공기가 안정된다는 사실을
작은 가슴으로 배워가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아이의 그림자는 가장 작고 가장 길게 흔들렸다.


집 앞에 거의 다다를 즈음,
아빠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엄마의 발걸음은 더 느려졌다.
둘 사이의 틈은 넓어졌지만
그 틈 한가운데 아이가 걸었다.

문이 열리고
집 안의 공기가 아이를 감쌌다.
낡은 전등이 희미하게 켜졌고
방 안은 조용했지만
어른들의 감정은 아직 식지 않은 채 벽에 붙어 있었다.

아빠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신발을 벗고 거실 쪽으로 사라졌다.
엄마도 깊은 숨을 들이쉬며
씻지도 못하고 소파에 몸을 던졌다.

아이를 둘러싼 집 안의 공기는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은 ‘평화’가 아니라
폭풍 뒤의 가라앉은 먼지와 같았다.

아이는 천천히 자기 방으로 걸어갔다.
방문을 닫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마치 방 자체가 아이의 무게를 함께 받아내는 듯.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작은 공책.
아이가 맨 처음 선물 받았던
저렴한 캐릭터 표지의 일기장.

아이의 손이 떨리며 공책을 연 순간
창문 바깥에서는 바람이 길게 스쳤다.
그 소리는 어른들의 목소리보다
훨씬 더 느리고, 훨씬 더 진실한 것처럼 들렸다.

탁—
아이의 연필이 종이에 닿았다.

방 안은 조용했지만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 소리,
전등이 가늘게 흔들리는 미세한 떨림,
복도에서 울리는 어른들의 낮은 숨소리가
희미한 합창처럼 섞여 있었다.

아이의 속마음은
마침내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는 듯
일기장 위로 천천히 흘러나왔다.

“오늘…
정말 내가 잘못한 걸까?”

연필끝이 작게 흔들렸다.
아이의 호흡도 함께 흔들렸다.

“라면을 들고 나온 게…
그렇게 큰 죄라서
아빠는 화내고
엄마는 울고
사장님은 나를 나쁜 아이로 보고…”

바람이 창문틈으로 스며들며
커튼을 아주 살짝 밀어냈다.
아이는 그 미세한 흔들림을 바라보다가
조금 더 글씨를 이어갔다.

“나는 그냥…
배가 고팠어.
그냥… 물어보는 법을 몰랐어…”

아이의 연필은 그 다음 문장 앞에서
한참 멈춰 있었다.
마치 마음속 문장을 꺼내기 전에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그런데
왜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모두가 화를 냈을까…”

아이의 작은 손등에
눈물이 똑 떨어졌다.
그것은 울음이라기보다,
잠시 멈춘 호흡이
물방울로 변해 떨어진 것이었다.

바람이 다시 방을 스쳤다.
아이의 머리카락이 아주 살짝 흔들렸다.

아이는 마지막 줄을 조심스럽게 썼다.

“나는 왜
오늘 아무 말도 못 했을까…
왜 아무도
내 말을 기다려주지 않을까…”

일기장을 천천히 덮는 순간
방 안의 침묵이 더 짙어졌다.
그러나 그 침묵은 아까와 달랐다.
아이는 처음으로
‘혼자만의 언어’를 가진 것 같았다.

바람이 멈추고
밤이 깊게 내려앉았다.
아이의 마음 한구석에도
아주 작은 빛처럼
새로운 문장 하나가 남아 있었다.


“나는…
말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
그게… 사라진 건 아니야.”

그러나 그 마음은
아직 아무도 듣지 못한 작은 목소리였다.

그때,
어딘가에서 경쾌한 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규칙적인 박자,
가벼운 리듬.

항상 공부를 잘하고,
밤늦게까지 야간 자습을 하고 오는
우리 누나였다.

그 발걸음이 복도 끝에서 들려오기 시작하자
그 경쾌함이
내 마음속에서 점점 다른 소리로 변해갔다.
망치처럼,
문을 두드리고
심장을 두드리고
내가 숨긴 일기장까지 두드리는 소리로.

문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문이 열렸다.

누나의 한마디.

“또 사고쳤냐?”

그 말은 짧았다.
하지만 짧아서 더 잔인했다.
눈빛, 목소리, 어깨의 기울기, 입술의 모양
그 모든 것이
나를 이미 정해진 결론 속에 밀어 넣었다.

누나는 방 안을 스치듯 훑고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문을 닫으며 돌아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오늘 하루 중 가장 차갑게 울렸다.

아이의 속마음
“…오늘 하루에 한 번인데…
나는 정말 사고만 치는 동생일까…?
사고를 안 치려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그 생각은
아까보다 훨씬 날카롭게
아이의 가슴 안으로 파고들었다.


d


문이 닫힌 뒤, 방 안엔 더 이상 누나의 발소리도, 어른들의 숨소리도 없었다.
하지만 고요함은 평온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을 톡톡 두드리는

압박처럼 아이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어둠이 내려앉자, 아이의 눈꺼풀도 천천히 무너졌다.
그리고 그날의 모든 일이
꿈이라는 다른 얼굴을 쓰고 다시 되돌아왔다.

학교 복도의 형광등이 번져 흐린 안개처럼 퍼져 있었다.
아이의 발끝 아래로 길고 좁은 복도가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양 옆에는 교실 문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문마다
커다란 눈동자 하나씩이 박혀 있었다.
문들은 눈을 꿈뻑거리며
아이를 바라봤다.

“또… 너냐?”

저 먼 곳에서, 선생님의 목소리와 닮은 음성이 울렸다.
그 목소리는 몸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복도 전체에서 울렸다.

아이의 발이 덜컥 굳었다.

교실 문 하나가 삐걱 열렸다.
문틈 사이로 규칙서처럼 보이는 커다란 종이들이
바람도 없는데 사각사각 넘어갔다.

그리고 종이 위에 적힌 단어들이
툭— 떨어져 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규칙”, “예의”, “도둑질 금지”, “모범”, “바른 행동”

이 단어들은 흙바람처럼 일어나 아이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이유를 말해봐.”
“규칙을 몰랐다고 변명하지 마.”
“그냥 하면 안 되는 걸 한 거야.”

여러 명의 선생님이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이가 알고 있는 ‘선생님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의 꿈속에서는 ‘한 사람’이 아니라
‘규칙 그 자체’가 입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아이의 입술이 꿈에서도 바짝 타올랐다.
말을 하려고 하는데, 입안에서는 모래가 굴러다니는 느낌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바닥에서 천천히 무언가가 자라났다.

라면 봉지였다.
현실에서 손에 들고 있던 그 라면.

하지만 꿈속에서의 라면은
점점 커지더니 아이의 무릎, 허리, 어깨 높이까지 자라났다.

거대한 라면 봉지가 떨며 말했다.

“너 때문에 내가 문제가 된 거야?”

아이의 목이 턱 막혀왔다.

꿈속에서조차 라면은
죄처럼, 낙인처럼, 사건처럼 변해 있었다.

아이의 심장은 꿈속에서도
현실보다 더 쿵쾅거렸다.

그런데 그때 복도 끝에서
학교 선생님이 현실과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빛이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처럼.

선생님 같은 ‘형태’만이 존재했다.

그 형체는 천천히 아이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너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그 말은 질문이었지만,
그 속엔 이미 정답이 정해져 있는 듯했다.

아이의 꿈속 목소리는
겨우겨우 터져 나왔다.

“…저는… 그냥…”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복도가 쩌렁 울렸다.

“그냥은 없어.
이유 없이 한 행동은 잘못이야.”

아이의 눈동자가 꿈속에서도 흔들렸다.

라면 봉지, 규칙의 단어들, 문에 달린 눈동자들,
모두가 동시에 아이를 향해 말했다.

“그건 잘못이야.”

“그건 네 책임이야.”

“그건 네가 몰랐기 때문이야.”

아이의 숨이 막혀 올 때쯤

그 한복판에서 아주 작은 속삭임이 터졌다.

“…난 정말 그냥… 배가 고팠을 뿐인데…”

그 말은 너무 작아서
꿈의 인물들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모두가 제각각 해석을 던지는 그 순간,
오직 아이 혼자만
제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의 눈이 번쩍 떠졌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고개를 들자
익숙한 교실 천장이 보였다.
눈앞에는 국어책,
옆자리 친구는 이미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학교… 책상?”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분명 방에서 잠들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방금 전까지 꿈속 복도에서
라면 봉지와 규칙의 단어들이 자신을 몰아세우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는
학교 책상에 고개를 떨군 채
졸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의 꿈이
어제의 현실과 뒤엉켜
하나의 장면처럼
아이의 머릿속을 세차게 스쳤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
“내가… 언제 여기서 잤지?”

머릿속은 어지럽고,
시간감각도 조금 무너져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어제의 라면 사건은
잠들었다고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무거운 그림자가 되어
가슴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아이의 마음속에서
아주 작은 결심이 일어났다.

“…선생님께
어제 일을… 여쭤보자.”

그 마음을 붙잡으며
아이는 천천히 일어섰다.
자신의 잘못을 따지려는 것도 아니라,
누가 옳고 그른지를 가리려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날의 자신이
무엇을 몰랐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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