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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학교 심리상담사

그날,나는 무엇을 몰랐을까

by 아르칸테

상담실 문을 열자

차분한 조명이 아이를 맞았다.
교실과는 공기가 달랐다.
조용했고, 부드러웠고,
누군가는 이곳을 ‘마음을 들어주는 곳’이라 불렀다.

그러나 아이가 들어선 순간,
누군가의 낮은 목소리가
이미 방 안에 스며 있었다.

“아, 네. 어머님.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걱정 많이 되셨죠…
음… 네, 저희가 오늘 잠깐 아이랑 얘기 나눠볼게요.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네… 네, 제가 잘 살펴보겠습니다.”

상담사는 전화를 끊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표정은 온화했다.
부드럽고, 이해하려는 듯한 표정.

하지만 그 눈빛 속에는
이미 ‘어떤 문제를 확인해야 한다’는
작은 판단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아이는 상담사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발끝을 모았다.

“○○야, 여기 앉아볼래?”
상담사는 손바닥을 펼쳐 의자를 가리켰다.
그 손짓은 친절했지만
낯선 긴장감이 있었다.

아이가 조심스레 의자에 앉자
상담사는 파일 하나를 천천히 뒤적였다.
그 파일 어딘가에는
아까 부모가 말한 내용이 적혀 있는 듯했다.

“오늘… 부모님께 연락이 오셨어.”
상담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가…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많이 흔들린 것 같다고…
혹시 평소에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지
보고 싶다고 하시더라.”

아이는 눈을 크게 떴다.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부모님이…?
정서에… 문제가 있다고…?
그게… 나 때문이라고…?

상담사는 아이의 불안한 기색을 읽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
여기는 그런 걸 따지는 곳이 아니야.
그냥… 네 마음이 어떤지
조금만 들려주면 돼.”

하지만 아이에게는
그 말이 꼭
‘네 마음에 뭔가 문제가 있는지 보고 싶어’
처럼 들렸다.

왜냐하면 상담사는
아이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이미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가슴속에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부모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상담사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음…
요즘 네가 많이 불안해 보이고,
집에서도 말수가 줄고,
어제 일도 그렇고…
혹시 마음에 상처가 남아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하시는 것 같아.”

상처.
그 단어가
아이의 귓속에 가만히 박혔다.

“상처…?
나… 상처받은 아이가 맞을까…?”

상담사는 아이의 표정을 바라보며
맞장구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혹시… 너도 그렇게 느껴?”

아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도둑질을 했다는 말보다
더 낯설고 더 무거운 말이
자기에게 씌워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상처’.
‘불안’.
‘정서’.
‘문제’.

아이는 그 단어들을
한 번도 스스로에게 붙여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어른들이 하나둘 붙여놓기 시작했다.

마치
도무지 벗겨지지 않는 이름표처럼.

아이의 속마음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회색 구름처럼 일렁였다.

“…나는…
단지 라면 하나 때문에
모든 게 이렇게 커져버린 걸까…?”


아이는 상담사의 질문에
여전히 대답하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상처’,
‘불안’,
‘정서 문제’…

도둑질이라는 말보다
훨씬 더 무거운 단어들이
자기 이름 옆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아이의 머릿속에서
어제 밤의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엄마의 울먹이던 목소리,
아빠의 날카로운 한숨,
누나의 닫히는 문 소리까지.

아이는 그때도 이해하지 못했다.

왜 라면 하나가
이렇게 큰 일이 되는 걸까?

자신은 단지
배가 고팠을 뿐인데.
정말 그것뿐이었는데.

그런데
그 작은 행동 하나가
엄마를 울리고,
아빠를 화나게 하고,
누나를 짜증나게 하고,
이제는 상담실까지 오게 만들었다.

아이의 가슴 속에서
혼란이 실타래처럼
꼬이고 또 꼬였다.

“…내가 라면을 가져온 게
정말 그렇게 큰일이었나…?”

아이는 두 손을 맞잡았다.
손가락 사이가
서늘하게 떨렸다.

집이 시끄러웠던 이유가
내 때문인 건 맞을까?
아니면…
어른들이 너무 크게 받아들인 걸까?

상담사는 아이의 떨림을
불안의 신호로 받아들인 듯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아.
네가 지금 이렇게 흔들리는 건
당연한 거야.
어제 있었던 그 일,
충격이었을 테니까.”

아이는 그 말을 듣고
더 말문이 닫혔다.

충격…?
그건…
어른들이 충격받은 거 아닌가…?
나는 그냥… 궁금했을 뿐인데…

아이는 어제
엄마가 왜 울었는지,
아빠가 왜 화냈는지,
누나가 왜 문을 그렇게 닫았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그저
“왜 그랬는지 알고 싶어서”
담임에게 물으러 갔던 건데…

지금 상담실에서는
정반대의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감정조절이 안 된다.’
‘정서적으로 흔들린다.’
‘상처가 깊다.’
‘불안이 있다.’

그 말들이
마치 아이의 마음 위에
알지도 못한 레이블처럼 붙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의 속마음에
새로운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가족을 걱정하면 안 되는 걸까?
내가 궁금해하면…
그게 문제가 되는 걸까?”

아이의 혼란은
단지 ‘왜 라면 하나가 문제인지’라는 의문이 아니었다.

이제는
“왜 내 감정과 생각이
어른들의 말 속에서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지”
그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상담사는 아이의 침묵을
또다시 불안의 증거로 받아들인 듯
부드럽게 말했다.

“많이 힘들지?
괜찮아, 여기서는
네 마음을 천천히 풀어도 돼.”

그러나 그 말조차
아이에게는
‘내 마음이 문제라는 뜻인가?’
라는 새로운 혼란만 더했다.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무도 듣지 못하는 한 줄의 속마음이 흘렀다.

“…난 그냥…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었을 뿐인데…”

아이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어른들은 문제를 듣지 않는다.
문제를 상상한다.
그리고 그 상상 속에서
아이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

그 순간,
아이의 내면에서
또 하나의 문이
조용히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떨군 채
상담사의 말이 이어지는 것을
멀리서 듣는 것처럼 느꼈다.

“괜찮아.
네 마음이 아픈 것 같아서…
우리가 잘 도와줄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의 머리 안쪽에서
무언가 ‘퍽’ 하고 울리는 듯한 감각이 스쳤다.

그 순간
세상이 아주 천천히 기울었다.

천장과 벽, 상담사의 얼굴, 책상 위의 연필들…
모든 것이
물 속에서 흔들리는 것처럼
출렁거렸다.

아이는 숨을 들이마시려 했지만
숨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가…
희미해져…

가슴이 답답했고,
눈앞의 상담사가
점점 또렷해지는 대신,
점점 이질적인 무언가로 바뀌기 시작했다.

상담사는 여전히 말을 하고 있었다.

“혹시… 집에서도 요즘… 감정이… 불안정하지는…?”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아이의 눈동자 속에서
상담사의 얼굴이 흔들렸다.

입술, 코, 눈이
점점 흐릿해지더니그 자리에서
라면 봉지의 모양이 겹쳐졌다.

상담사의 머리가
봉지의 테두리로 바뀌고,
목소리도
부스럭거리는 비닐 소리처럼 진동했다.

“왜 훔쳤어…”

아이의 심장이 멈춘 듯했다.

“왜… 훔쳤어…
왜… 그랬어…”

그러지만 않았어도..

상담사의 입이 움직일 때마다
라면 봉지가 꿈에서처럼
아이를 몰아세우는 형체로 변했다.

아이의 머릿속에서
어제의 꿈속 복도와
오늘의 상담실이
한 장면처럼 겹쳤다.

라면 봉지의 커다란 그림이
상담실 벽에서 기어 나오는 것처럼 보였고,
상담사의 목소리는
점점 비명과 같은 금속성으로 변했다.

“네가 잘못한 거야…”
“네가 그런 행동을 해서…”
“네가… 네가…”

아이는 숨을 놓쳤다.

“아… 안 돼…”

눈물이 가득 고였다.
몸이 떨렸다.

그리고

“그만!!!”

아이의 울음 섞인 외침이
상담실을 찢었다.

아이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방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손이 문고리를 제대로 잡지도 못한 채
문을 밀어젖혔다.

“○○야! 잠깐만—!!”
상담사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지만
아이는 듣지 못했다.

복도가 휘어졌다.
바닥이 흔들렸다.
세상이 기울어진 채
아이의 발밑에서 빠르게 밀려나갔다.

아이는 울면서 달렸다.
눈물로 시야가 번졌다.
숨은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고
가슴은 칼로 그어놓은 듯 아팠다.

복도 끝에서
누군가 아이를 붙잡았다.

“○○야! 무슨 일이야!”

엄마였다.
뒤이어 아빠도 달려왔다.

아이의 얼굴은 눈물범벅이고
어깨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엄마는 아이를 꼭 안았다.
아빠도 급히 아이에게 손을 얹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집에 가자.
괜찮아, 아들…”

아이의 울음은
엄마의 품 안에서 폭발했다.

“아빠… 엄마…
나… 왜… 왜 이래…
라면… 그냥… 그냥…”

말은 울음 속에서 뭉개져
형체를 잃었다.

엄마는 아이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은 떨리고 있었지만
부드러웠다.

“괜찮아…
엄마가 데려갈게.
이제 집에 가자.”

엄마가 아이를 부축하려는 그 순간

뒤에서 상담사가 바쁘게 다가왔다.

“어머님, 잠시만요…!”

상담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그 안에는
‘나는 잘못 없다’는 급한 방어가
용수철처럼 튀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엄마가 불안한 눈으로 물었다.

“도대체 우리 애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상담사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아이가 들을 수 없는 거리까지
엄마를 살짝 끌어당겼다.

말의 첫 단추부터
이미 자신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꿰어지고 있었다.

“저… 어머님,
사실… 아이가 오늘 굉장히… 예민했어요.
저희가 보기에도
정서적으로 불안정해 보이는 부분이 있었고요.”

엄마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상담사는 멈추지 않았다.

그럴수록
자기 책임이 더 작아지니까.

“아까도…
대화를 나누는 동안
갑자기 감정이 폭발하는 모습이 보여서…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진실은 ‘상담사의 질문이 아이의 공포를 자극했다’였지만,
상담사의 말 속에서는
그 이유가 전부 아이의 문제로 바뀌고 있었다.

부모의 불안을 조장하는 말투.
책임을 피해가는 부드러운 단어 선택.
학교 체면을 지키기 위한 방패.

“혹시…
집에서도 요즘 감정 기복이 심하거나…
말수가 줄거나…
그런 모습이 있었나요?”

엄마는 당황해 머뭇거렸다.

“아… 뭐… 요즘 조금 예민한 건 있었지만…
그게… 이렇게까지…”

상담사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 한 마디가
자신의 말에 신뢰를 더해주는 결정적 근거라도 되는 것처럼.

“네, 네… 맞아요.
그래서 제가…
그 부분들을 좀 더 자세히 보려고 했던 겁니다.”

‘조금 전 아이를 몰아세운 건 실수였다’
라는 문장은
상담사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대신
“아이의 정서 문제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라는 메시지가 자연스레 포장되었다.

상담사는 마지막으로
엄마 앞에서 걱정하는 척 말했다.

“일단 오늘은…
집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게 해주세요.
저도 기록 남겨두고
내일 다시 한 번 상담을 해보겠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안은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상담사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한숨은
아이를 걱정하는 숨이 아니라,

“다행이다…
큰 문제 없이 넘겼다…”

라는
자기 안도의 숨이었다.

아이는
엄마 품 안에서 흐느꼈다.

상담사의 말은
아이가 들은 것보다
엄마가 믿은 것이 더 무거웠다.

학교 복도로 나가는 동안
아이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라면 봉지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왜… 훔쳤어…
왜… 그랬어…”

아이는 엄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떨었다.

“…난 그냥…
알고 싶었을 뿐인데…”

교문 너머의 공기가
선명하게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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