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스님

그날,나는 무엇을 몰랐을까

by 아르칸테

9장. 스님 – 알지 못함의 공(空)


아침 공기는 아직 식어 있었다.
아이와 친구는 오래된 시골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창문은 햇빛을 받아 살짝 뿌옇게 빛났고,
흔들리는 좌석 아래에서는
버스가 오래된 골목을 지나가는 진동이 잔잔히 전해졌다.

친구는 신이 난 듯 말했다.
“절 가면 공양밥도 먹고, 스님들이랑 얘기도 하고 그래. 재밌어.”

하지만 아이는 창밖만 바라보았다.
골목의 끝이 멀어질수록,
마치 어제의 자신도 함께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붙여준 말이 아니라,
내가 정하는 말…’

그 문장이 조용히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그 뒤에,
아이가 스스로도 잘 설명할 수 없는 마음 하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나를 처음으로 관찰해보고 싶었어.”

그 마음은 아직 말이 되지 않은 형태였지만,
아이의 내면에서 가장 처음으로 발생하는
‘자기 관찰’의 욕구였다.
어제까지는 세상의 말들에 떠밀렸다면,
오늘의 아이는 처음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싶어진 것이다.

버스가 산길을 돌자
안개가 천천히 내려와 길 위에 깔렸다.
친구는 아무렇지 않게 창밖을 보며 말했다.
“절은 저기 위야. 좀만 가면 보여.”

버스가 멈추고,
둘은 돌계단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솔잎에 맺힌 물방울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공기는 도시보다 훨씬 조용했다.
모든 소리가 약해지고,
대신 정적이 더 크게 들려오는 듯했다.

절 마당에 들어서자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고요한 풍경 속에서
대웅전의 나무가 오래된 숨을 쉬듯 흔들리고 있었다.

친구는 엄마아빠에게 손을 흔들며 달려갔다.
아이만 혼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망설이며 서 있었다.

그때,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오는 아이구나.”

아이는 뒤돌았다.
한 스님이 서 있었다.
회색 승복은 햇빛을 머금어
하얗게 빛났고,
그 얼굴은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늙지도 젊지도 않은 얼굴.
시간이 그를 지나가며
어떤 흔적은 지우고,
어떤 흔적은 남긴 듯한 얼굴.

스님은 아이를 흘깃 바라보더니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긴장할 필요 없단다.
여긴… 누구든 자기 마음을 잠시 내려놓으러 오는 곳이니까.”

신부님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신부님의 목소리가
부드러운 손으로 등을 쓸어주는 느낌이라면,
스님의 목소리는
바람이 살짝 몸을 스쳐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절에 와보는 건 처음이에요.”

스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이라면 더 좋지.
모르는 곳에서는
자기 마음을 더 잘 볼 수 있으니까.”

아이는 눈을 깜빡였다.
“제… 마음을요?”

스님은 아이를 데리고
절 한쪽 작은 마루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탁자도, 의자도, 상도 없고
그저 텅 빈 나무 마루만 있었다.

스님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여기 앉아보렴.”

아이는 조심히 앉았다.
스님도 그 옆에 가만히 자리를 잡았다.

잠시 침묵.
그 침묵은 성당의 침묵과 달랐다.
성당의 침묵이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공간처럼 느껴졌다면,
절의 침묵은
이미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침묵 자체가 ‘말’을 하고 있는 듯했다.

스님이 입을 열었다.

“사람은 말이야 자신이 어제든 오늘든, 스스로 한 행동들을
정말로 자신의 마음을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아이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스님은 아주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린 흔히 그래.
‘내가 왜 그랬는지 알아.’
‘나는 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아.’
이렇게 말하지.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자기 마음을 제대로 모른 채 움직여 버린단다.”

아이의 손가락이 조용히 움직였다.
스님은 그 작은 떨림까지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날의 너도 그랬을 거야.
행동은 분명 네가 했지만,
그 행동을 일으킨 마음은…
네가 다 알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지.”

그리고 스님은 바람결처럼 이어 말했다.

“마음을 모른 채 움직이는 것,
그게 바로 인간이 가진 가장 자연스러운 무지란다.
그걸 알아차리는 순간부터…
비로소 ‘관찰’이 시작되지.”

아이는 스님의 말을 끝까지 듣고도
당장 무슨 뜻인지 단번에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들이 마음속 어딘가를 조용히 건드리고 지나가는 것만은 분명했다.

아이의 시선은
자기도 모르게 바닥의 나무결을 따라 움직였다.
마치 그 나무결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흔들림을 대신 보여주는 것처럼
올라갔다 내려가고, 굽었다 펴지는 선들이 이어져 있었다.

“…그럼요.”
아이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제 마음을 잘 모른 채로 움직였던 건가요?”

스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랬을 가능성이 크지.”

아이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무언가 잘못했다는 마음이 아니라
‘아…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었구나’ 하는
낯선 자각이 찾아오는 느낌이었다.

스님이 말했다.

“우린 행동만 기억하려 해.
뭘 했는지,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하지만 행동을 밀어 올린 ‘마음’은
거의 돌아보지 않지.”

스님은 손가락으로 바람을 스치듯 허공을 그었다.
“마음은… 이렇게 움직였을 수도 있고,
저렇게 움직였을 수도 있어.
그날 배고팠을 수도 있고,
억울했을 수도 있고,
그저 무언가를 쥐고 싶은 충동이 왔을 수도 있지.”

아이는 숨을 멈춘 듯했다.
그 말 하나하나가
마치 꿈속에서 본 금빛 들판에 다시 서 있는 듯
가슴 깊은 곳에서 잔잔히 펼쳐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의 행동만 보고
너에게 ‘이름’을 붙였을 거야.”
스님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아이의 마음에선 크게 울렸다.

그때 아이는 생각에 잠겼다.

그날들의 사건과 이름들..

“도둑.
결핍.
문제아.
상처.
미성숙.”

아이의 어깨가 살짝 움찔했다.
그 말들은 꿈속 괴물을 이루던 단어들이었다.

스님은 말했다.

“그 이름들은
네 마음을 본 게 아니야.
네 행동의 겉면만 본 거지.”

아이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아주 작은 돌멩이가 ‘딱’ 하고 제자리를 찾는 듯했다.

“…그럼 저는요?”
아이는 자신의 귀에도 어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 그날의 저를
어떻게 봐야 하는 거예요?”

스님은 아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판단이 아니었고,
설명도 아니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아이’를 바라보는
아주 맑은 시선이었다.

“그건…”
스님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지금부터 네가 스스로 관찰해야 한다.”

아이는 눈을 크게 떴다.

“네 마음이 왜 그렇게 움직였는지,
정말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걸 네가 직접 들여다보는 거지.”

스님은 아이의 가슴 쪽을 가리켰다.
“남들의 말이 아니라,
해석도 아니라,
설명도 아니라…”

그리고 조용히 이어 말했다.

네가 네 마음을 들여다본 자리에서 나온 말.
그게 너를 설명하는 첫 번째 언어가 된다.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어제까지는
세상이 붙여준 이름들 사이에서 흔들렸다면,
오늘은
아주 작은 한 걸음이었지만
처음으로 ‘나’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아이의 속마음이 조용히 말했다.

“…나를… 처음으로…
내가 직접 보고 싶어.”

그 마음은 작았지만,
마치 어린 싹처럼
이미 땅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스님은 그 마음을 느낀 듯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그게 관찰의 시작이다.”

절 마당의 바람이
잠시 아이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그 바람은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제 네 마음의 문이…
조용히 열리고 있다.

-

절 마당의 바람이 잦아들고,
아이의 속눈썹에 햇빛이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스님은 마지막으로 아이의 어깨를 가볍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따 공양시간이 되면 다시 보자꾸나.
나는 잠시 손님들을 맞으러 가야겠구나.”

그리고 스님은
절 마당 한편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이를 남겨둔 채,
조용히 다른 사람들의 고민을 들으러 가는 듯한 발걸음이었다.

아이의 곁에는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나무는 마치
아이가 이곳을 찾아오기를 오래 기다린 것처럼
넓은 그늘을 부드럽게 펼치고 있었다.

아이는 그 나무 아래 조심히 누웠다.
바람이 나뭇잎 사이로 지나가며
자장가처럼 잔잔한 소리를 냈다.

잠이 가볍게 내려오기 시작했다.
눈꺼풀은 나뭇잎 그림자처럼 흔들렸고,
점점 무거워졌다.

그러자 어느 순간—

꿈이 아이를 데리고 갔다.

아이는 텅 빈 흰 공간 위에 서 있었다.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어디까지가 땅인지
구분되지 않는 여백의 세계.
그곳에서는
아무 목소리도, 아무 그림자도
아직 생기지 않은 듯 고요했다.

그때,
바닥 한가운데에
라면 봉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봉지.
새것처럼 반짝이지도 않았고,
헌것처럼 축 처져 있지도 않았다.
마치 누군가 오래 붙잡고 덧칠해온 오해의 껍질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아이가 가까이 다가가려고 한 순간,
사방에서 말들이 쏟아졌다.

“저건 도둑이 만지는 물건이다.”
“결핍의 상징이지.”
“문제 행동의 단서야.”
“충동 조절이 안 될 때 저런 걸 쥔다니까.”

그 말들은
라면 봉지의 겉면을 향해 손가락을 뻗고 있었다.
봉지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열어보려 하지 않았다.

라면은 천천히 꿈틀대기 시작했다.
겉면이 울고, 모양이 흔들리고,
붙여진 의미들이 마치 과부하가 걸린 듯 흔들렸다.

그러더니
라면 봉지는
작은 냄비처럼 보였다.

아이의 눈이 반짝했다.
“…냄비…?”

그러나 목소리들은
여전히 같은 문장만을 반복했다.

“훔친 증거다.”
“결핍이다.”
“문제의 징표다.”
“관찰할 필요도 없다.”

아이는 그 말들이
점점 더 멀어지고 흐려지는 걸 느꼈다.
마치 물속으로 가라앉는 모래처럼
말들이 무게를 잃어갔다.

그때—
라면 봉지가 다시 한 번 흔들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곡선을 그리며 펼쳐지더니
널찍한 그림자를 만드는
부드러운 모자가 되었다.

바람도 없는데
모자의 가장자리가 흔들렸다.
모자는 단순한 모자가 아니라
무언가를 감춘 모양이었다.

아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모양이 모자일 뿐,
속은 다른 걸지도 몰라.”

마치 그 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아주 오래 숨겨져 있는 듯했다.

그러나 어른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변함없었다.

“겉을 보면 알 수 있다.”
“보이는 것이 전부다.”
“이유는 필요 없다.”

그들의 말은
더 이상 아이에게 닿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아이는 아주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저 사람들은
라면을 보면서 라면을 안 보고 있네.”

겉모양만 읽고,
겉모양만 믿고,
겉모양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어른들.

라면이 어떤 모양으로 변하든
그들은 끝내 겉의 말만 붙잡고 있었다.

라면 모자는
아이의 손끝으로 스며들듯 흔들렸다.
형태는 녹아 흐르고,
색은 따뜻하게 번지며,
결국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되었다.

그 무언가는
아이의 마음속 작은 빈자리로 들어왔다.
그곳은
단어들이 붙지 않은 자리,
아직 이름이 없는 자리였다.

그때,
누군가 조용히 속삭였다.

“…눈앞의 모양보다
네 마음의 눈으로 보렴.”

아이는 흠칫했지만
그 목소리는
낯설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거기 있던
자기 마음의 아주 작은 목소리처럼 들렸다.

흰 여백의 공간은
빛처럼 흔들리며
부드럽게 접히더니
사라졌다.

아이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바람이 나뭇잎 하나를
아이의 가슴 위로 내려놓았다.

아이는 그 나뭇잎을 바라보며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겉이 전부가 아니구나.”
“겉에 붙은 이름도 진짜가 아닐 수 있겠네.”
“안쪽을, 제대로 보고 싶어.”

그 말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지만,
아이의 마음 속에서는
새싹이 흙을 밀어 올리듯
분명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절을 떠나 산길을 굽어 내려가는 버스 안.
친구는 피곤한 듯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친구 부모님은 뭔가 뿌듯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애가 말이야, 오늘 나물이랑 반찬을 아주 잘 먹더라고.”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아이는 원래 이런 걸 좋아해.
어릴 때부터 몸에 좋은 건 절대 안 남기지.”

아이는 고개를 돌려 조용히 친구를 바라보았다.

친구는 눈을 절반쯤 감고 있었지만
아이만 알아볼 수 있는 아주 미세한 표정—
피곤함과 억지 사이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버스가 흔들리자
친구가 아이에게 속삭였다.

“…나 사실 나물 싫어해.”
“근데 왜…”
“엄마가… 내가 잘 먹으면 좋아하니까.
그러면 집에서 덜 혼나.”

아이는 조용히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 동안 마음속에서 자라난 생각이
다시 한번 힘을 얻는 순간이었다.

겉으로는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속에서는
좋아서가 아니라 ‘맞추기 위해’ 움직인 행동.

아이의 마음속에는
작은 파문이 일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정말로 그 사람의 마음과 같지 않을 때가 있구나.’

버스 창밖의 풍경이
천천히 뒤로 미끄러져 갔다.

마을에 도착해
친구네 가족과 함께 식당에서 밥을 먹게 됐다.
상 위에는 된장찌개, 나물, 고기, 여러 찬들이 놓였다.

친구 어머니가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아이는 저 나물 정말 좋아해요.
집에서도 맨날 더 달라고 하죠.”

친구는 억지로 웃었다.
젓가락으로 나물을 집어 입에 넣었지만
그 표정은
아이에게만 읽히는 작은 신호를 가지고 있었다.

어른들의 말은
‘사실’처럼 식탁 위를 지나갔지만,

아이의 눈에는
그 말들이 모두
겉에서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보였다.

집에 돌아오자
하늘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아이의 방 안은 조용했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은
절 마당에서 느낀 그것과 비슷한 온도를 갖고 있었다.

아이는 천천히 이불 위에 눕고
오늘 하루를 다시 떠올렸다.

라면 봉지의 꿈,
스님의 말,
친구의 고백,
식탁에서 오간 어른들의 ‘확신’.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스스로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걸 너무 쉽게 믿어.아니,,그게 더 좋고 편한가?”
“하지만… 나는 오늘부터 그 안을 보고 싶어.”

그 말은
아이가 스스로 처음으로 내린
작은 결심이었다.

창문 너머로
저녁 바람이 한 번 불어오고
방 안은 조용해졌다.

아이의 마음 한가운데에 심어진 새싹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자라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