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성장의 한걸음

이상한 골목 상인

by 아르칸테

아저씨와의 대화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바람도, 길가의 그림자도,
심지어 내 발걸음까지 모두 숨을 죽인 듯했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무언가
아주 작은 소리로 움직이고 있었다.

심장 아래쪽에서 돌덩이가 조금 굴러가는 듯한 소리.

아저씨 말이 천천히 떠올랐다.

“책임은 두려움을 들고 한 발 내딛는 훈련이다.”

나는 코끝으로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한 발.”말을 꺼내는 순간 손바닥이 다시 땀에 젖었다.

‘민수한테 먼저 가볼까?’아마 내일 학교에서?‘아빠에게 한마디 해볼까?’

그건… 아직 너무 무서울 것 같았다.

‘하린에게 메시지를 보내볼까?’
쓰다가 지울 것 같았다.

어느 것도 “완벽한 선택”은 아니었다.

어느 것도 내가 원하는 결과를 보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중 단 하나만은 내 가슴 안쪽에서 천천히 빛을 냈다.

‘지금, 아주 작은 걸 하자.’

나는 주머니 속 돌멩이를 꽉 쥐며 천천히 핸드폰을 꺼냈다.

손가락이 떨렸다.
한참 동안 아무것도 누르지 못했다.

“후…”

한번 더 숨을 들이마신 뒤 나는 결국, 아주 짧은 문장을 적었다.

민수 미안.우리 얘기 좀 하자.
내일.단 세 줄.너무 짧아서 진심인지 아닌지도 모를어설픈 문장.

몇 번이나 지우고 다시 쓰다가 결국엔
그냥 보내버렸다.

전송.

메시지는 어디로 날아가는지 모른 채 파란 불꽃처럼 사라졌다.

그 순간, 내 심장은 주먹만큼 커져 쿵 내려앉았다.

“하…”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이 이번만큼은 내 등을 잡아당기지 않았다.

대신 가슴 안쪽에서 어딘가 단단하게 굳어가는 감각이 있었다.

마치 나라는 존재가 살짝 조금 더 깊이 박힌 것 같은 느낌.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집 문 앞에 다다랐을 때, 합리화의 그림자가 아직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엔 그 그림자를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를 이길 필요도 없다는 것도. 문을 잡았다.

아주 천천히,조금 더 단단하게.

“한 발…”

나는 조용히 속삭이며 문을 열었다.

그 작은 열림 속에서내 책임은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자 집 안에서 풍기는 익숙한 냄새가 나를 감쌌다.
그 냄새는 늘 똑같았는데, 오늘만큼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내가 바뀌기 시작해서 냄새도 다르게 느껴지는 것처럼.

나는 신발을 벗다 말고 작게 중얼거렸다.

“…내일은 민수한테 먼저 가야지.”

그 말이 나를 조금 기운 나게 했다.

그리고 다음날 교실 문을 열었을 때 민수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항상처럼 장난치지 않고 말없이 필통만 만지작거렸다.

나는 목이 말랐다.
돌멩이처럼. 그래도 걸어갔다.

“민수야.”

그 한 마디에 민수가 훅 고개를 들었다.

나랑 눈이 마주치자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나는 준비해 온 말들을 전부 잃어버렸다.

그래서 그냥 말했다.

“…미안했다. 나도 헷갈렸고
너한테 화난 척했는데 솔직히…너 잃는 게 제일 무서웠어.”

민수는 입술을 꽉 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초가 엄청 길게 지나갔고

그러다 민수가 작게 말했다.

“…나도 미안. 너 진짜 그런 줄 알고 열받아서 그랬어.”

나는 눈을 깜빡였다.

민수가 먼저 사과하는 걸 처음 봤다.

그 순간 알았다.

‘한 발’은 혼자만의 발걸음이 아니라 상대에게도 길을 열어주는 문이라는 걸.

민수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야, 근데 우리 예전처럼 지내자.내가 먼저 많이 웃어줄 테니까.”

친구끼리 야 미안해 미안해!!

나는 괜히 코끝이 뜨거웠다.

“그래… 그렇게 하자.”

참 신기했다.
합리화의 그림자가 조금 걷히자 사람들이 전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쉬는 시간,창가에 기대 서 있는 하린이 보였다.

예전 같았으면 달려가 붙잡고 말했을 것이다.
“우리 다시 잘해보자.”
“오해 풀자.”
“내가 잘할게.”

하지만 오늘은 마음이 달랐다.

나는 주머니 속 돌멩이를 가만히 만졌다.

돌이 아주 작은 숨결처럼 말했다.

‘움직임이 선이다. 하지만 움직임엔 방향이 있어야 한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하린 옆에 섰다.

“하린아.”

하린이 고개를 돌렸다.

“응?”

잠시 말을 고르는 시간이 흘렀다.

“…나, 그동안 너한테 미안했던 게 있어.”

하린의 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나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가…네가 나 좋아해주니까 그 마음에 기대려고 했던 것 같아.
좋아해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내가 불안해서 너한테 기대는 거였어.”

하린은 말없이 내 얼굴을 바라봤다.나는 숨을 한번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한테 솔직하지도 못했고…내 기분이랑 두려움 때문에 너한테 상처도 줬던 것 같아.”

잠시 침묵.

하린이 작게, 그러나 또렷하게 말했다.

“…나도 잘한 건 없었어.” 나는 놀라서 하린을 보았다.

하린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네가 흔들리는 거 알면서 계속 붙잡았어.
진짜 네 마음을 듣기보다
그냥…내가 보고 싶은 너만 보려고 했던 것 같아.”

그 말에 가슴이 뜨거워졌다.하린이 살짝 웃었다.

“그래서 미안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둘 다 그냥 어렸던 거구나.”

“응.너도, 나도.”서로 잠깐 웃었다.

이상하게도 슬프지 않았다. 비워지는 느낌이 아니라
도려내야 했던 무거운 덩어리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린아.우리…이제부터는 서로 좋은 친구로 지내자.
서로 기대서 무너지지 말고,서로가 원하는 어른이 되자.”

하린은 한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좋은 어른 돼서 좋은 대학 가자.우리 둘 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건 진짜 약속 이였다.

종이 울리고 하린과 나는 별말 없이 나란히 걸어 복도를 지나갔다.

하교길엔 햇빛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하린이 말했다.

“이상하다.우리 둘이 헤어진 게 아니라…정리된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정리된 거야.미래를 위해서.”

하린은 어깨를 살짝 올렸다.

“그럼 미래에서 보자, 준호야.엄청 멋진 어른 돼서.”

나는 작게 웃었다.

“그럼 미래에서 보자, 하린아.너도 멋진 어른 돼서.”

둘은 걸음걸이를 맞추다 자연스럽게 갈림길에서 멈췄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손을 흔들었다.그때 알았다.

놓아주는 것도 어른이 되는 또 하나의 책임이라는 걸.

그렇게 나는 하린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민수와의 관계를 다시 세워가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책임이란 ‘과거에 머무르는 선택’을 끊어내고,지금의 나로 앞으로 걸어가는 힘이라는 것.

그날 이후, 나는 뒤를 붙잡지 않고
앞을 바라보는 법을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자
아빠는 거실에서 TV 불빛만 켜둔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평소처럼 무겁고, 어색하고, 말 대신 침묵이 흐르는 공기. 예전 같았으면
그냥 고개 숙이고 방으로 들어갔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나는 주머니 속 돌멩이를 꼭 쥔 손을 뒤로 숨긴 채 조심스럽게 아빠 앞으로 걸어갔다.

“아빠.”

입으로 말한 게 아니라, 나는 두 손을 들어 수화로 말했다.
손끝이 떨려 동작이 조금 어긋났다.

아빠는 TV를 끄지 않은 채로 내 손을 바라보았다.
놀란 듯,그 표정은 아주 천천히 흔들렸다.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다시 수화를 이었다.

“아빠가 화낼 때…나는… 무서워.”아빠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 작은 정지 움직임만으로도 아빠의 마음에 균열이 나는 게 느껴졌다.

나는 계속했다.

“내가 잘못하면…아빠가…나를 싫어할까 봐…항상 겁났어.”

내 손은 마지막 문장에서 완전히 흔들렸다.
그 떨림마저 숨길 수가 없었다.

아빠는 오래, 아주 오래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정말 조심스럽게 아빠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수화 동작이 서툴렀다.
평소보다 느렸고 중간에 몇 번 틀렸다.
하지만 그 서투름이 오히려 진심처럼 보였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빠 입에서 듣지 못했던 말,아빠 손에서 본 적 없는 말이었다.

아빠는 TV를 끄고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나도…아빠가 처음이라 방법을 잘 모른다.”

동작이 잠시 흔들렸다.

“너한테 잘하고 싶은데…그게… 잘 안 됐던 것 같다.”

나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말보다 손동작 속에서 아빠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전부 느껴졌다.

나는 한 발 다가서고 두 손으로 답했다.

“말해줘서 고마워.”

그러자 아빠가 서서히 손을 내렸다.
그리고 오랜만에 매우 조심스럽게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손의 떨림이 말했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은 없다.”

그 순간 우리 사이에 있던
두꺼운 유리벽 같은 것이 조용히, 아주 조용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질 무렵,나는 책상에 앉아 조용히 돌멩이를 바라보았다.

민수는 다시 웃어줬다.

하린은 좋은 친구로 남았다.

아빠는 처음으로 내 마음을 들어줬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아무도 시키지 않았고, 아무도 보장해주지 않았고,
그 어떤 약속도 없었다.

그냥 내가 움직였기 때문에 조용히 생긴 변화였다.

나는 돌멩이 위에 손을 올리고 속삭였다.

“…선은 움직임이구나.”

돌은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손바닥 아래에서
미세하게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건 마치 오늘 내가
처음으로 ‘내가 되고 싶은 나’를 향해
한 발을 내디뎠다는 걸 묵묵히 알려주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떨구며 천천히 중얼거렸다.

“근데…관계라는 게 내가 원하는 대로 얻고 싶은 대로 되는 건 아니구나.”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 가슴 안쪽에서 오래 숨죽이고 있던 뭔가가
조용히 풀렸다.

“하린이와,민수,아빠도…” 나는 돌멩이를 굴렸다.

“결과가 늘 내가 바라던 것처럼 돌아오는 게 아니구나.” 바람이 스쳤다.

그리고 그 바람 사이로 아저씨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겹쳐 들리는 듯했다.

‘책임은 결과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결과를 받아들이는 힘이다.’

나는 그 말을 천천히 마음속에 놓았다. 곧이어 또 하나의 깨달음이 떠올랐다.

“…내가 해온 행동들. 내가 한 선택들.그게 만든 결과들이구나.”

좋았든, 나빴든,원했던 것이든, 원치 않았든
그 모든 것이 내가 걸어온 길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책임진다는 건…그 결과가 내가 꿈꾸던 모습이 아니어도 도망치지 않는 거구나.”

돌멩이가 손안에서 가볍게 굴러갔다.
이번에는 무섭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이게…진짜 책임이구나.”

그 순간, 나는 알았다.

관계란 내가 원하는 대로 잡아끄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보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다시 나답게 움직이는 것에서 다시 시작된다는 걸.

그 말은 돌멩이를 쥔 손에서부터 천천히 가슴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나는 오늘의 나보다
조금 더 단단해진 내일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