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있어도 괜찮아.
15장. 칸트의 규칙적인 고독
감정이 아닌 구조로 살아간다는 것 칸트는 고독을 선택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고독을 배치한 사람이다.
니체의 고독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선택이었다면,
칸트의 고독은 시계처럼 반복되는 구조였다.
칸트는 극적인 인물이 아니다.
방랑하지 않았고,고독을 예찬하지도 않았다.
그는 단 한 번도 “혼자여야 한다”고 외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삶 전체는 철저히 혼자 작동하는 구조였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시간에 산책하고,
같은 시간에 사유하고,
같은 시간에 글을 썼다.
사람들은 이 반복을 지루하다고 말한다.
인간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칸트의 고독은 오해된다. 칸트에게 고독은 고립의 결과가 아니라
감정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설계된 환경이었다.
그는 감정을 믿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감정이 판단의 자리에 앉는 순간 윤리는 흔들린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단련하기 위해
사람을 멀리한 것이 아니라,자기 안의 흔들림을 줄이기 위해
삶 전체를 구조로 고정했다.
칸트의 고독은 외로운 고독이 아니다. 비장한 고독도 아니다.
그의 고독은 조용하고, 반복적이며, 감정의 소음을 최소화한 상태다.
이 상태에서 그는 묻는다.
“이 판단은 지금의 기분 때문인가, 아니면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가.”
칸트의 유명한 윤리는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정언명령은 감정의 고양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을 제외한 자리에서 천천히 만들어진다.
그래서 칸트에게 고독은 사유의 극적 순간이 아니라
사유가 가능하도록 항상 유지되는 바탕이었다.
그는 혼자 있을 때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같은 조건에서만 생각할 수 있도록 자기 삶을 조율했다.
이 점이 중요하다.
칸트의 고독은 깊어질 필요가 없다. 길어질 필요도 없다.
대신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오늘 기분이 좋다고
판단을 바꾸지 않고,오늘 우울하다고 원칙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그는 고독을 생활의 리듬으로 만들었다.
여기서 이 책의 고독과 칸트의 고독이 만난다.
이 책이 말하는 고독 역시 깊은 깨달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감동적인 통찰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다만 감정이 판단을 앞서지 않도록
잠시 멈출 수 있는 구조를 요구할 뿐이다.
“지금 이 판단은 지금 상태의 나에게서 나온 것인가.”
“이 결론은 조금 늦춰도 괜찮은가.”
칸트는 이 질문을 매일 같은 자리에서 같은 태도로 던졌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사상가이기 이전에 자기를 통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칸트의 고독은 자유를 위한 고독이었다.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자유가 아니라,감정에 끌려가지 않을 자유.
이 자유는 혼자 있을 때만 가능하다.
사람들 속에서는 감정이 증폭되고,기대가 생기고,반응이 판단을 밀어낸다.
칸트는 이 모든 변수를 제거한 자리에서 생각하려 했다.
그 자리가 그에게는 고독이었다.
그래서 이 장에서 꼭 짚고 가야 할 문장은 이것이다.
칸트에게 고독은 쉼이 아니라 윤리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었다.
우리는 칸트처럼 살 필요는 없다.
그의 엄격함을 그대로 가져올 필요도 없다.
하지만 하나만은 배울 수 있다.
고독은 감정을 진정시키는 시간이 아니라,감정이 판단을 대신하지 못하도록
자리를 비워두는 구조라는 것. 이 구조가 있을 때
사람은 덜 후회하고,덜 흔들리고,덜 변명한다.
칸트는 혼자가 되기 위해 사람을 떠난 것이 아니다.
판단을 지키기 위해 고독을 생활로 만든 사람이다.
이 고독은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오래 간다.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칸트의 고독은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현실적인 형태로 남아 있다.
나도 한때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 감정이 왜 내 삶을 흔들고, 내 판단 위에서 마음대로 뛰노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감정이 한 번 휘몰아치기 시작하면 폭풍이 지나가듯, 나는 내 몸을 그 흐름에 맡겼고 내일도, 다음도 없는 선택을 했다. 말로 던지고, 행동으로 증명했다.
그리고 늘 같은 후회, 같은 잘못, 같은 결말을 내가 반복해서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다 나는 칸트를 만났다. 그리고 비로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붙잡게 되었다. 판단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고집스러운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타인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기 위해서. 내 감정에 따라 여기서는 내 말이 옳고, 저기서는 틀려지는 모순을 만들지 않기 위해 나는 도덕의 규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마치 신을 만난 사람처럼 칸트를 닮고 싶었고, 칸트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삶을 흉내 내듯 살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산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혼자 있는 시간은 길어졌다. 그 고독은 나에게 안정을 주었고, 생각할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이 반복되면서 나는 다시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생각하는가.’
‘무엇을 판단하고 싶기에 이토록 고독한가.’
결국 답은 하나였다. 나는 사람과 연결되고 싶었다. 진심으로, 진실로, 모순 없이. 어쩌면 그 꿈은 허상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진실하게, 모순 없이 살아가다 보면 결국 그런 사람들과 연결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끼리끼리 만난다.”
“선비는 한 고을의 친구 하나면 충분하다.”
“살면서 좋은 사람 한 명만 얻어도 인생은 성공이다.”
나는 이런 말들을 믿는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로워서 관계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내가 어떤 사람을 원한다면, 먼저 고독을 이용해 나를 살피고 다독여야 한다. 스스로를 보살피고, 하루 동안 들었던 말과 배운 것들을 집에 돌아와 고독한 시간 속에서 곱씹어야 한다. 그 의미를 천천히 음미해야 한다.
이 음미의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맛있는 것을 먹었을 뿐이고, 맛없는 것은 뱉어냈을 뿐이다. 그러나 음미하는 시간을 잘 가져가면, 우리는 그와 같은 음식을 만들지는 못해도 그 맛을 알게 된다. 그래서 좋은 것을 판별할 수 있게 되고, 마음만 먹으면 더 나은 무언가를 타인에게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나는 칸트와 닮았다.아니, 닮고 싶다.
그래서 그의 결론이 아니라 그가 왜 그런 삶을 선택했는지가 늘 궁금했다.
사람들을 보며 나는 자주 같은 질문 앞에 멈춘다.
왜 저토록 힘들어하는가.왜 끝없는 인간관계의 고통 속에서
계속 머무르는가.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 곁에서자기를 흔들게 두고,
그 흔들림을‘관계’라고 믿어버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진실을 보지 못한 채 자기 결을 찾지 못하고,그 자리가 틀렸다는 신호를 느끼면서도
계속 그곳에 발이 묶여 있는가.왜 힘들어하면서도
그 고통에서 나오는 법은 아무도 배우지 못하는가.
나는 그 질문들 앞에서 사람들을 이해해주고 싶었다.
끝없는 공감 속에서 그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설명만으로는,공감만으로는 아무도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먼저 나를 다루기 시작했다.
통제하고,절제하고, 고독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고독이 괜찮다는 것을 말로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방식으로 증명하기 위해서였다.알려주고 싶었다.
고독은 버티는 것이 아니라 다루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 생각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고독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좋다.
만약 돈이 기름이라면, 인간관계가 환경이라면,
고독은 자신을 정비하는 시간이다.
정비 없이 계속 달릴 수는 없다.
아무리 좋은 기름이 있어도,아무리 좋은 환경에 있어도
정비되지 않은 사람은 결국 멈춰 선다.
고독은 멈추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다시 나아가기 위해 자기를 바로 세우는 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고독을 이야기한다. 사람을 떠나라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 속에서도 자기를 잃지 않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책에서 말하는 고독은 도피가 아니다.
외로움의 미화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를 회복하고, 자기 결을 다시 맞추는 가장 조용한 기술이다.
그리고 나는 그 기술을 함께 익히고 싶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