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초하루
으레 아는 속삭임 같이, 잠언 같이, 매일 알았지만 매일 까먹고 사는 그런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같은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책을 받고도 바로 읽지 않았어요. 예상되는 그런 가르침이 있을 것 같아서요.
그렇게 며칠을 안 보고 지내다가 올해의 마지막 날 엄마 집에 가는 길에 책을 봤습니다. 예상대로 그런 가르침이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이런 생각들 하는 걸 좋아하니까(그러니까 인간이란 무엇인가, 같은 생각) 어느 정도는 이 책이 어떤 내용이고 어떤 메시지를 담았으며 결국 내가 책을 덮은 후 어떤 생각을 할 거란 걸 알고 있었습니다.
인생에는 일보다 더 소중한 순간들과 풍경들과 의미들이 있다고 이야기해요.
이미 개똥철학이든 처세술이든 뭐든 수 없이 많은 곳에서 가르침을 받았고 잊지 않으려 해도 금세 잊고 살게 된 그런 지혜들이에요.
이런 책을 읽고 나면 나는 바로, 나와 나의 오늘은 어땠는지 생각해요.
유달리 요즘의 오늘들은, 나만의 나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슬펐는데 말이죠.
나는 요즘 일 때문에 놓치는 것들이 많아진 내가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괴롭습니다. 나는 매일, 나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전 오늘 하루를 반성할 때 까지요.
요즘에 일 때문에 힘들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일이 힘든 게 아니고.
나에게 주어진 24시간 동안 '일 고민'이 너무 많아진 것, 만나는 사람 대부분이 일에 겹친 사람이라는 것, 일 아닌 다른 일상을 '일 이외의' 것이라 여기게 된 것.
이 책은 나에게, 정말 네가 지금 슬프겠구나 라고 얘기해요.
그래서 결국, 이 책은 나에게 슬프게 살지 말라고 하네요.
나는 자주 나의 어렸을 때를 생각합니다.
네모네모한 회사원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책방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영화관 매표소 직원이 되거나 파출부를 하겠다 라고 생각하던 뭐 그런 시절 말이죠.
진심 아닌 얘기 하지 말라고, 나는 내가 원한대로 지금 회사를 다니며 잘 먹고 잘 살고 있기는 하지만..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인생과 환경, 상황들, 진실과 가짜, 아름다움과 사랑, 즐거움과 슬픔에 대해서 할 일 없이 고민하던 그런 한가하고 허무맹랑하던 시절 말이에요.
잃은 게 더 많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어떻게 하면
나를 구할 수 있을까? 나의 시간들을?
방법을 찾아야겠구나 생각해요.
오늘 집에 가는 길에 고양이가 전신주 까치를 보고 냐옹 거리던 것을 우연히 봤는데, 오늘은 그래도 하나 이렇게 발견해서 다행이에요.
ㅎㅎㅎ
내일 무언가 새로운 풍경을 발견하고 나와 세상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하려고 합니다.
나에게 그런 계기들이 찾아오고 나도 잘 찾았으면 좋겠어요.
한 해의 마지막 날 이 시 읽는 걸 깜빡했네요.
하루 늦었지만.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