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달 Jan 21. 2018

김대환 감독 <초행>

나이를 먹는다기보다는 시간을 먹고, 사람들과 함께 하는 순간이 누적되면서 영화를 보는 나의 지평도 달라진다.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지평이 언제나 '넓어지는' 식의 발전과 상승 형태는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영화 속 특정 상황에 대한 해석은, 경험과 체험이 늘어난 만큼 독단적 레퍼런스에 갇혀 주관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물론 이게 꼭 나쁜 것도 편협한 것도 아니다. 단지 시간을 많이 지나온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보다 좋아진 지평을 갖게 되어 영화를 보는 눈이 무조건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김대환 감독의 <초행>, 이 기가 막히게 섬세한 영화는 리얼하다, 사실적이다, 우리 경험과 똑같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진짜스러운 1시간 40분짜리 풍경들을 뚝 떼어다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아마 '결혼'에 대한 직간접적인 고민과 경험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무릎을 치며 공감했을 것이다.


나 역시 결혼이라는 현실, 우리 세대의 현실, 우리나라의 현실을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감상 아닌 관찰을 하게되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이 영화를 '현실'에 대한 것으로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현실적인 문제가 틈입한 순간, 불안해진 누군가들은 영화가 끝날 때쯤 훈훈한 메시지를 예상할 것이다. 혹은 현실의 유사 경험으로 슬퍼지려는 나에 대한 자기 위로를 할 것이다. 인생의 모든 오늘은 '초행길' 이기 때문에 짐작할 수도 예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수 없이 많이 발생하지만, 이렇게 부딪혀 나가는 그 자체가 바로 인생의 아름다움(?)이라고.


혹은 완전히 반대로, 혹자들은 영화를 보고 난 후가 썩 상쾌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난 여기에 속한다. <초행>은 정말 살아보지 않은 미래의 삶에 대한 미화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삶을 거울처럼 보여주어 관객 스스로의 반추를 유도하고, 이토록 당황스러운 혹은 비굴하게 견뎌야 하는 순간들을 굳이 그려낸 것일까.


<초행>은 그동안 살면서 처음으로 겪어본, 혹은 처음으로 겪을 경험과 삶에 대한 반추를 요구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식의 영화가 되기를 바란다면 주인공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과 주변 사람들에게 일종의 '화해'를 시도했을 것이다. 방금 지나온 길에 발생한 접촉 사고들에 대한 사과, 혹은 모든 것들을 품고 함께 가는 아량. 하지만 삶이 이렇게 누군가의 양보와 넓은 아량만으로 해결된 일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은 상황들도 있다. 혹은 유보해두고 모른 척 해야할 때도 있다. <초행>의 주인공들은 이런 순간들이 왔을 때 그 사고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그저 나의 길을 가는 방식을 택한다.


나의 길은 그저 나의 길이고 나의 인생일 뿐이다. 내가 이렇게 살기로 결심하고 다짐한 이 시간들과 나는 언제나처럼 여기에 그대로 있다. <초행>은 바로 여기에 있는 나와 나의 길 안에, '어쩌다' 혹은 '예정대로' 마주치게 되는 수많은 사건들과 사람들의 순간들이 나의 삶에 끼어들 때, 그들을 나의 삶에 어떻게 중첩하고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이것을 방법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영화가 방법으로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달리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삶의 무수한 순간들은 우리에게 모두 '초행'이다.  이미 인간으로 태어난 그 날부터가 모두 예외없이 초행이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서 가능한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잘 살아볼 수밖에.

작가의 이전글 새해 초하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