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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Feb 04. 2018

홍상수 <그 후>

아무 날이나 시간이 '후'가 되지는 않는다. 어떤 일이나 사건의 시간적 기점이 생겨났기 때문에, 혹은 사후에라도 그런 기점을 단정 지었기 때문에 그로부터 '후'라는 시간들이 생기는 것이다. <그 후>는 출판사 사장과 부하 직원의 불륜이 발각된 그 후의 짧은 하루, 거기서 또 얼마간이 지난 훗날을 기록한 영화다. 


사실 현실 속 홍상수의 '그 후'들 때문에 홍상수의 영화를 제대로 보는 것은, 언제부턴가 쉽지 않게 되었다. 알다시피 홍상수의 '그 후'들은 <그 후>가 짐짓 묘사하고 있는 그런 날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알쏭달쏭한 현실과 영화적 허구의 혼란 속에서  <그 후>는 홍상수가 가장 잘 써 내려갈 수 있는 자아적인 풍경들을 그려냄과 동시에 철학적인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이 영화 속에서 쏟아지는 많은 토론거리들을 듣고 있노라면, 적어도 철학을 좋아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인간이라면 늘 생각할만한 주제들이야"라는 공감을 하면서도 "홍상수는 이런 이야기들을, 지금 여기서 굳이 시간을 할애해가며 열심히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의문도 품게 된다. <그 후> 속의 이 사람들, 아니 엄밀히 홍상수는 '그 후'가 계속되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이 영화를 통해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득, 이런 간극이 바로 홍상수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무지하게 불편해하고 있는 홍상수의 '그 후'는 계속되고 있지만,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거침없이 증오하고 있는 불륜-비도덕-대중의 공격을 무참히 무시하는 그의 실체(reality)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는 존재는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후>에서 권해효와 김민희가 대뜸 깊이 파고드는 주제인 "왜 사는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하는 것들, 이런 생에 대한 질문들은 결국 돌고 돌아 생에 대한 것에서 답을 찾고 안착하려 하는 듯했다. 자신의 소생인 '딸 때문에' 산다는 권해효(극 중 봉완)의 말은 사실 홍상수 개인의 윤리적 책임 때문에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이것이야 말로 별 다른 이유 없이 그저 '생'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생을 이어나가는 이유의 원천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공통된 본질은 '생'에 대한 것 멀리 떨어지지 않는다. 왜 사는지, 무엇을 믿으며 사는지 묻던 김민희는 자기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전 제가 주인공이 아님을 믿어요" "언제든 죽을 수 있는 나를 믿어요" 이런 믿음조차 나를 살고 있는 나라는 존재를 인지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외부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충돌을 겪었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후'에서 보여준 이런 답변들 덕분에 홍상수의 다음 작품 역시 엄청난 생의 의미를 갖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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