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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Sep 01. 2018

번안 사회

지금 우리의 사회와 시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역사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 유형의 것이든, 무형의 것이든 말이다. 역사라는 게 일체 없어서 모태를 알 수 없는, 아주 새롭게 시작된 어떤 사조나 경향, 물건이 탄생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왜 그럴까? 과거의 어떤 것을 연상시킨다거나, 참조해서 이해할 수 있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연장선 안에서 우리는 수많은 것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역사'를 떼놓고는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데 한국의 역사-근현대사의 면면들을 되짚어 보면 우리의 역사이지만 우리의 자생적인 힘으로 세워지지 않은 어떤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 단서는 불행하게도 ‘일본’에 있고, 실로 높은 비중으로 '번안'의 방식이 쓰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주체적으로 우리 외부의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시대 상황에 따라 마구 번안된 흔적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많이 보인다. <번안 사회>는 일본과 미국, 그밖에 여러 나라를 번안의 방식으로 채택하고 받아들인 한국의 역사를 되짚고 있는 책이다.


번안? 그런 어설픈 방식이 요즘 같은 시대에 가능한가?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지구촌으로 연결된 요즘에 가당키나 한 일인지. 하지만 과거에 남겨진 번안의 쉽고 편리함 때문에 번안의 방식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런데 여기엔 공통된 경유 지점이 많이 보인다. 바로 일본 식민지 시대의 흔적이다. 식민지를 겪으면서 한국에는 수 없이 많은 일본적인 것이 남았다. 그리고 해방된 지 7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식민지의 잔재가 깨끗이 씻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오늘날에 이르러 '번안'된 어떤 것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한국엔 '번안'된 일본의 것, 미국의 것, 그 밖의 국가의 것들이 해방과 동시에 사라지지 못하면서 참 많이 남아있다. <번안 사회>에서는 이를 3가지 챕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1장은 식민지 시대의 제국주의적 장치들, 2장은 우리 생활문화에 스며든 실생활의 물건들, 3장은 음악, 영화 등 대중문화를 실어 나른 여러 문화 플랫폼들을 살펴본다. 안타깝게도 이 책에서 하나하나 꼬집는 것들 중에 당당히 부정할 수 있는 내용은 없다. 우리 생활 속 수많은 물건과 사조, 개념들은 식민지 시대에 번안되어 아직까지도 우리의 생활과 가치관에 스며들어 있다. 가까이에서 생각해보면...출판사에서 이 책 <번안 사회>를 만들면서 일본어로 된 출판 관련 업계 용어를 단 한 번도 안 썼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돈가스'라는 요상한 메뉴는 식민지를 거치며 유럽과 일본의 요리 방식과 우리의 외식 문화의 짬뽕 집합체라 할 수 있다. 건축 업계에서 쓰는 '와꾸'라는 단어가 어느샌가 일반인들의 일상에 침투했고, 아직도 학생들은 모두가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진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간다.


일상에 수 없이 파고든 우리 속의 번안의 흔적을 다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것이 수 없이 긴 번안의 시기를 거쳐 오늘날까지도 우리 삶에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중요하다. 그 기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아야, 제대로 나와 나의 삶을 바꾸고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번안 사회>는 그런 경각심을 일깨워주기에 참 좋은 책이다. 다만 서술 방식이 좀 어려운 편이고(쉽게 쓴 노력은 보이지만 학술지 같은 인상이 꽤나 진하다) 했던 말이 반복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식민지 시대를 경유한 우리의 사회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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