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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Sep 15. 2018

<명당>

땅으로 품은 당신의 욕망

요즘 시대에서 '땅'이라는 말에 사람들은 어떤 생각들을 하게 될까? 아마도 '부동산'을 가장 많이 생각할 것 같다. 땅은 곧 재산이고 부이며, 우리 가족과 가문의 미래를 보장하는 그 어떤 것이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렇다. 땅이라는 이 짧은 단어가 부동산 간판 곳곳에 생뚱맞게 들어가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유를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대에서 땅이라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재산으로서 가치를 가진 어떤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 <명당>은 바로 이런 한국인들의 자연스러운 연상 작용을 전제로 하여,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를 처음부터 큰 설명 없이 바로 시작해 버린다. 그러니까 제목에서 연상되는 그 어떤 '재래의 이론적인 것'을 깊게 추적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명당>은 땅을 둘러싼 왕가의 세손과 양반 가문의 갈등, 그리고 이들 사이에 개입된 땅쟁이들인 '지관'의 삼자구도를 쉼 없이 빠르게 보여준다.




이름난 양반 가문이자 왕실에서도 높은 관직에 앉아있는(임금의 외가 쪽 어르신이기도 한) 김좌근은 예상대로 땅에 대한 욕심이 많은 인물이다. 그는 당연하게도 단지 '땅'에 대한 욕심만 있는 사람이 아니다. 명당이라고 하는 좋은 땅에 조상님들의 묘를 모셔서 좋은 기운을 후손이 이어받고, 그 기운으로 부를 축적하고 주요 관직에 오르고, 나아가서는 더 큰 권력을 쟁취하고자 한다. 그가 바라보는 땅은 바로 그런 '안정적인 미래를 만들어주는 물질적, 영적 수단'이다. 그는 그의 아들과 함께 이러한 욕망을 앞뒤 좌우 가리지 않고 키워 나가면서 그것을 쟁취하기 위한 일에도 물불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권력에 눈이 먼 이들의 욕망 때문에 국가의 권력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초반부터 보여주면서, 영화의 주인공인 박지관 (조승우)이 어떤 역할로 이들의 욕망을 잠재워야 하는지를 암시한다.


이 과정에서 (백성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기는 하지만) 국가의 안녕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박지관(조승우)은 몰락한 양반 세손인 흥선과 함께 김좌근을 처단하기 위한 결탁을 시작한다. 하지만 '내 편'에 있는 것 같았던 흥선 역시도 또 다른 욕망으로 명당을 바라보던 사람이었다. 결국 역사의 수순대로 흥선은 이 3각의 명당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바로 그 명당을 거머쥐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의 역사는 우리가 배운 실제의 근현대사와 겹쳐지게 된다. 현실이 어색하게 연결되면서 영화는 끝이 나고, 바로 그 '땅'이 있어 가능하게 된 우리의 지금을 급히 돌아보게끔 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땅을 둘러싼 각자의 욕망이 각자의 시선대로 이어지는 <명당>은 이 넘쳐나는 욕망들을 2시간 내내 전시하는 일에 치중되어 있는 영화다. 물론 이러한 전시는 전적으로 '요즘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활용된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아이러니한 현실에 실소를 터트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폭발적인 욕망의 전시에 그칠 뿐이다. 조선 후기대부터 시작된 비틀어진 욕망이 현대의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무엇을 돌아봐야 하는지는 잘 나와있지 않다. 엔딩 장면에 이르러서 억지로 붙은 현대사의 사실 하나가 그 역할을 겨우 해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명당>에서 현대와 다를 바 없는 조선 후기 사람들의 땅에 대한 욕망, 그것도 현대의 현대인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땅에 대한 욕망을 그저 관람하는 것에 그칠 뿐이다. 결국 <명당>을 보는 관객은 (감독이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엔딩으로 가면 갈수록 이들의 욕망을 뜬 눈으로 지켜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원통함에 눈물을 흘리는 박지관의 상황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분명히 조승우는 <명당>의 주인공이기는 하지만 메시지적으로는 주인공의 역할이 제대로 부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승우에 이입되어 있는 관객 역시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현대의 강남에 대한 욕망을 지금과 다를 바 없이 전시하고 있는 점은 재미를 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두배의 씁쓸함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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