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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Sep 28. 2018

규정된 판타지로 가득한 <에브리데이>

예상보다 새끈하게 잘 빠진 이 영화 <에브리데이>는 대관절 강요된(?) 판타지로 가득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거슬리는 부분 없이 부드럽게 잘 이해되면서 흘러가는 영화다. 대놓고 말도 안 되는 소재이기는 하지만(홍보사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이 영화는 <뷰티 인사이드>와 설정이 약간 비슷하다) 굳이 큰 의문을 제기하고 싶지는 않다. 이게 바로 이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매끄러움의 정체다.


<에브리데이>를 보고 왜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이미 규정되어 버린’ 설정이 이리도 많은가?라는 물음을 굳이 던지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건 <에브리데이>가 이미 <뷰티 인사이드>로 인해 익숙해진 빙의 소재라서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설정 자체가 물음을 던질 가능성을 닫아버린 영화이기 때문에 던지지 않는 것이다.


<에브리데이>의 ‘규정된 판타지’는 딱 우리가 바라보고 싶은 그런 이상적인 상황이 판타지라는 껍데기만 가지고 그 환상적인 힘을 발휘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이미 남자 친구가 있는 여자 주인공 주변을 맴돌며 그녀에게 어떻게든 다가가고 싶은 영혼뿐인 주인공이 있다. 그는 그녀 동네에 거주하는, 동갑인 나이의(그래서 확률적으로 같은 고등학교 학생인 가능성이 높은) 친구의 몸에 들어가 그녀에게 접근한다. 매일매일 이어지는 이 이상한 현상들에 대한 의심은 아주 짧게 스쳐지나갈 뿐이다. 그리고는 너무 갑자기(?)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사랑의 힘이 대단하니 여기까지는 이해는 된다. 그리고는 갑자기 그들은 현실을 자각하며 판타지 로그아웃을 마우스 클릭 정도로 쉽게 수행한 뒤 현실에 순응하고야 만다. 쉽게 시작하고 끝날 수 있는 판타지적인 설정이라면, 도입부에 그 이유나 명분이 충분히 따라주어야 관객 역시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기적적으로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에브리데이>에 이런 이유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런 부실한 상황 속에서 등장인물들이(미국의 중산층 고등학생이라는 점을 상기해보자)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좀 안타깝기까지 하다. <에브리데이>의 수많은 에피소드와 갈등은 관객의 예상을 단 1cm도 벗어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에브리데이>는 매일매일 달라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다채로움’을 강력한 무기로 갖고 있으면서도, 매일매일 새로울 것이 없는 등장인물들의 예상되는 이벤트를 예상만큼만 보여줄 뿐이다. 여기에 ‘하이틴 영화’ 특유의 클리셰까지 범벅이 되다 보니 이 영화의 에브리데이는 조금 지겹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브리데이>를 봐야만 하는 이유를 찾아보자면, 매일매일 다른 이의 몸을 빌려서 여자 주인공을 맴도는 초자연적인 영혼(성별을 분명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남자라고 단정 지어도 무방하기는 하다)의 지고지순한 순애보 때문이다. <에브리데이>의 순애보는 이 영화 속 모든 사건들의 동기이자 결말이고 개연성이다. 그래서 <에브리데이>는 순애보의 영화다. 요즘 세상에, 그것도 미국에서, 그것도 미국의 고등학교에서 이게 가능한 설정이냐 싶은 이런 ‘부조화’는 이런 순애보로 설명 가능하다. 결말은 완전 해피엔딩은 아니지만...여자주인공을 위해 해피 엔딩의 자리마저 내준 <에브리데이>의 초자연적 영혼의 주인공은 그래도 수고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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