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 하이웨이>는 제목에서 불러오는 '청량감' 때문에 영화 대한 인상이 일단 너무 상쾌하다. 가볍고 귀여우며, 산뜻하지만 또 거침없이 앞을 향해 달려가는 긍정적인 캐릭터를 그려본다. 추상적일지언정 느낌이 나쁘지는 않다. 이 뜻 모를 청량감은(도대체 '펭귄'과 '하이웨이'가 어떤 이유로 조합된 단어인지는 조류 전문가가 아니고서야 단번에 알아채기 힘들지 않은가? 포스터를 봐도 시놉시스를 봐도 알 수 없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굉장히 기분을 좋게 하였다. 적어도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아무튼 기대감을 품고 <펭귄 하이웨이>를 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아까 느꼈던 청량감은 온 데 간데없고, 2시간 동안 내가 보고 온 것은 무엇인지 내용적으로는 종잡을 수 없다. 이런 느낌은 영화를 잘 만들었다/ 못 만들었다를 떠나서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황당함이다. 모든 영화가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품고 있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미지의 환상성에만 의지하는 것도 곤란하다. 게다가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한 주인공의 특징이나 맥거핀도 상당히 많다. 영화 안에 해석해야만 할 것 같은 떡밥이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많은 것들이 러닝타임 안에서 해석될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지는 않다. 그러다가 어느새 <펭귄 하이웨이>는 자연과의 통섭을 암시하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 버린다.
이 영화는 무언가 노골적인 메시지를 말하는 듯 하지만, 그게 또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듯이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것으로 많은 포장을 하고 있다. 사실 <펭귄 하이웨이> 안에는 수 없이 많은 욕망이 섞여 있다. 순수한 어린 시절로 관객들을 끌어들이면서도 그 안에서 너무 과할 정도로 성적인 장치를 많이 배치시켰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여자 주인공의 ‘가슴’을 대놓고 많이 언급하고 희화화한다. 이 때문에라도, 이 영화는 적어도 한국에서는-아무리 높은 완성도를 가졌다 하더라도-당대의 정서상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주된 소재는 아니라는 듯이 자연과의 친밀화에 또 많은 시간을 쏟는다. 1차적인 관객으로 설정된 일본인, 일본인 남성은 여기서 어떤 안도와 위안을 느낄 것이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동일본 대지진의 트라우마와 관련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알 수 없는 힘’으로 설명되는 바다라는 대 자연은 근거를 알 수 없는 힘으로 우리 삶을 위협한다. 하지만 <펭귄 하이웨이>의 용기 있으면서 젊은, 유능한 히어로는 특유의 모험심과 탐구력으로, 비록 그 답을 명확하게 밝혀내지는 못하더라도 우리의 삶 그리고 우리가 사는 터전과의 상생을 이끌어 낸다.
소위 ‘네임드’라고 불릴만한 당대 애니메이션 감독들의 다른 영화들에 비해 작화 퀄리티가 떨어지지는 않는다. 2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고른 퀄리티로 만들어 냈다는 것 자체는 상당한 점수를 주고 싶다. 내용 특성상 ‘물’을 표현하는 일이 많은데, 작은 물방울에서부터 시냇물, 초월적 개념을 갖고 있는 ‘큰 바다-커다란 물방울’을 표현하는 일까지(거의 얼음에 가깝다) 각기 다른 물의 형태를 2D의 순박함을 유지하면서 각각의 특징을 서로 다르게 잘 표현하였다. 하지만 이런 시각적인 완성도만으로 이 영화를 괜찮다고 평가하기에는 <펭귄 하이웨이>의 내용적인 면이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좋다/나쁘다를 떠나서 이 영화는 무언가 난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