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보아서 <영주>는 <로제타>를 닮아있다. 여자 주인공 영주의 외면과 내면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그가 맞닿아 있는 조건들이 그렇다. 영화를 보는 초반에 이런 생각이 든 순간, 관객이 <영주>를 아무렇지 않은 마음으로 보는 것은 힘들어진다. <로제타>의 영화적 순간이 큰 오열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더라도 '로제타'의 삶을 생각하는 것은 영화를 빠져나온 이후에도 마음 한편에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주의 삶 역시 그렇게 느껴졌다. 아마 '영주'로 분한 김향기 배우가 너무 연기를 잘해서인 것도 한몫했지만, 극 중 두부가게 아주머니(김호정 분)가 영주를 따뜻하게 부르던 순간의 음성이 영화를 다 보고 나와서도 메아리처럼 들렸기 때문일 것이다.
<영주>는 어쩌면 관객들에게 비극적인- 구체적으로는 물질적인 삶이 궁핍한-여성 히로인의 연장선에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주>의 영주는 물질적인 삶의 궁핍함 보다 더 이겨내기 힘든 슬픔이 있다(구체적으로 영화의 줄거리를 이야기할 수는 없으나 <로제타>를 연상한다는 사실로 내용 설명을 대신하겠다). 사실 영화 속 영주의 삶을 '슬픔'이라고 정의한다는 것이 과연 맞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슬픔이라는 정서로 간단하게 설명하기엔 힘든 '누군가에게 닿지 못함'이 영주의 인생에 영원히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위에서 언급한 '두부가게 아주머니'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까 <영주>는 단순히 소녀가장의 영화가 아니다. 물질적인 궁핍함은, 생각보다 영주를 옥죄는 시련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영주에게는 내가 좋아하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닿을 수 없는 숙명에 대한 슬픔이 있다. 비록 이 숙명은 본인이 만들고 본인이 저버린 것이라 할 지라도, 이제 갓 20살이 된 영주에게는 이것은 예측할 수 없었던 슬픔이었을 것이다. 이런 예측할 수 없는 사건과 인연이 하나의 매듭이 되고 꼬이기도 하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영주>는 결론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단순한 인생의 법칙을 이야기하기까지 영주가 겪어야 하는 사건들은 너무 비극적이다. 비현실적으로 영주 곁에는 그 어떤 친구도 존재하지 않고, 그 어떤 도시적인 배경도 특징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평범한 일상에서 나이 열아홉, 스물인 여자아이에게 서울이 이렇게 무의미하고 외로울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 모든 게 가려지고 의미를 잃은 곳이 진짜 영주의 삶의 공간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곳이 2018년(혹은 그 근처의) 서울이라는 것은 물리적으로는 느껴지지만, 사실 아무런 작동도 하지 않는 배경이다. 교통사고가 일어났고 엄마 아빠가 물려준 유일한 재산인 집한 채만 있는 이곳은 비극의 단서는 되었지만 그에게 아무런 역할로 기능하지 않는다. 빛을 잃긴 했지만 그렇다고 슬픔이 아주 깊지도 않은 잿빛으로 그려지는 수준이다. 비극과 내 삶의 발목을 잡는 일들이 수 없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기는 하지만, 이런 사건들보다 더 영주의 삶을 힘겹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결핍이기 때문이다.
영주, 혹은 로제타라고 하는 그들은 영화 너머 우리 생활 근처에 정말 살고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영화를 보고 나온 직후 둘러본 도시의 풍경이 이런 슬픈 착각으로 겹쳐지는 순간을 종종 겪는다. <영주>는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온 이후가 더 슬픈 영화다. 영화가 영화로 가둬진 곳에서 슬픔을 그치지 못하고, 바깥으로 나온 현실의 공기에까지 그 정서를 전염시키는 영화는 정말 슬프다. 영화 주인공의 삶을 실제처럼 여기고 상상함으로써 슬픔이 전이되는 현상은, 어쩌면 진짜 대놓고 비극을 쥐어짠 영화보다도 슬픈 것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