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빠져든다는 느낌을 오랜만에 가져다준 독서였다. 문지 스펙트럼에서 나온 <이별 없는 세대>는 번역서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를 거쳐서 도착한 번역임을 잊게 하고, 내가 지금 책을 읽고 있는 이 공간이 지하철 열차 한 구석, 버스 한 귀퉁이라는 사실을 잊게 해 주는 하나의 세계였다. 하얗고 심플하게 디자인된 이 책의 표지는 사실 많은 정보를 주지 않았다. 어떤 분위기를 가지고 있을지, 어떤 이야기를 할지, 그리고 독자를 어떤 세계로 인도할 지도 예상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책을 펴 들어 겨우 몇 장 읽기 시작한 그 순간, 독자인 나는 전쟁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결코 외롭지는 않았다. 저자 볼프강 보르헤르트는 정말 외로운 문장들을 끊임없이 연결하고 있었지만, 그 문장들의 곁을 졸졸 따라가는 독자인 나는 외롭지 않았다. 흔히 볼 수 없는 뚝뚝 끊어지면서도 짧은, 하지만 호흡이 느껴지는 문장 때문일지도 모른다. 제목에서 말하는 '이별 없는'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를 생각해보면, 혹시 이렇게 독자가 느끼는 감정 또한 그 뜻 안에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이별 없는 세대>를 읽으면서 참 독특하다고 느낀 경험은, 정말 짧디 짧은 초단편이 내내 이어짐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단지 장면 묘사에만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각각의 단편들은 서로 다른 제목을 달고 존재하고 있지만, 각 단편들 속의 인물들은 동시대에서 동일한 역사를 경험하고 있었다. 동일한 시간 속에서 동일한 고독과 슬픔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견뎌내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에 '세대'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는 것인가 싶다. 각자는 각자의 방식과 생각대로 지금을 견디고 있다면, 그것은 '세대'라는 개념으로 하나의 맥락 있는 표정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부는, 무언가 외로우면서도 쓸쓸한 풍경은 이 단편들의 묶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칠해져 있다. 그래서 책을 읽어 내려가다가 보면 읽는 독자 조차도 춥고 외로운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무언가 슬퍼지기도 한다. 그런데 단지 외로워서 슬프다는 생각만 든 것은 아니었다. 역사라는 숙명적인 사실, 그리고 그로부터 사람의 안에서 고이는 갖가지 감정들이 무언가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한 외로움이 탁월한 작가를 통해서 문학이 되는 순간, 그러니까 글로서 살아 숨 쉬는 무언가가 되는 순간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외로움을 외롭지 않게 만드는 빛이 되는 것 같았다. 전쟁의 시간 속 추운 겨울밤, 빛 하나 없는 적막한 동굴 속에서 희망인지도 절망 인지도 모르는 저 멀리의 빛이 그려진다. <이별 없는 세대>를 보며 내가 상상한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