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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Jan 05. 2017

나, 다니엘 블레이크

어렸을 때 약간은 막연하면서도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은 '영화로 세상을 배운다'는 말이었다. 사실, 쌓여온 경험이 그랬다기보다는 강령을 먼저 세우고 그렇게 살고 싶은 욕망이 더 크기는 했다. 이건 내가 정말 좋아하는 감독이 했던 어떤 말에서 얻은 힌트 같은 것이다. '영화는 세상에 대한 예의'라는 말을 허우샤오시엔이 했는데 나는 이 말을 고등학교 때 영화 잡지에서 봤었다. 그렇게 사는 길을 가지 못했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불과 몇 년 전부터 이해하기 시작했지만.

 

아무튼 나에게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보여주는 감독이 세 명 정도 있는데, 그중 한 명은 켄 로치 감독이다.


나는 정말 영화적인 순간의 영화를 좋아하지만, 세상이 영화 위에 있다는 걸 보여주는 감독의 영화도 좋아한다. 나에게 켄 로치는 그런 감독이다. 그래서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정말 보고 싶은 영화였다. 영화를 본지 며칠이 지났지만 이 영화는 정말 무언가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영화다. 


심장병을 앓고 직업을 잃은 목수 다니엘 블레이크는 빌어먹을 그 질병수당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를 시작한다. 정부는 이런저런 핑계를 들어 질병수당 탈락 통보를 한다. 그 대신 실업급여를 받으라고 하고, 다니엘 블레이크는 정부의 그런 명령에 실업급여와의 싸움을 또 시작한다. 하지만 또 실패하고 결국 다시 질병수당을 받기 위해 항고하기에 이른다. 이와 중에 비슷한 처지의 이웃을 알게 되고 서로 의지하며 생활을 이어간다. 그 이웃과 함께 항고를 하러 간 날, 그는 심장병으로 죽는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다분히 사회적인 메시지를 가지고 있고 해석은 정치적으로도 가능하다. 아니, 이런 영화는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정의롭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사회 문제가 우리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갈 때 반드시 신자유주의 혹은 인간적인 영혼을 상실한 시스템의 최전방에 있는 국가에 어떤 방식으로든지 도착해야 한다 말하기도 한다. 2천 년대 이후로 이런 영화들의 탄생 비극은 왠지 반복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어서 더욱 민감하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단지 이런 문제는 아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비극을 비판한다는 의식적인 행동보다, 보다 본능적인 주제인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매우 어려운 말 같지만 그냥 쉽게 생각하면 '인간은 어떤 세상에서 어떻게 대접받고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이 문제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 접속도, 사용하기도 어려운 복지 신청 인터넷 페이지라니. 이런 거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정의를 이야기하는 많은 영화들의 궁극은 결국 인간 존엄성을 향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건 자칫하면 되게 엄숙해지기 마련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극 중 화자가 직접 말로 그 이야기를 하고, 그 존엄성의 문제가 생활을 살아가는 인간이 생활의 어떤 지점에 이르렀을 때, 즉 바닥을 쳤을 때 그 이야기를 비로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생활의 필수적인 순간' 속에서 보여준다. 이런 환경 속에 있는 인간이라면 생이 붙어있는 모든 순간은 '필수'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필수적인 순간이 위로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주고받아야 하는 상생의 가치에서 비롯된 배려이다. 나는 이 영화가 가끔 환기하는 그 '위트'있는 순간도 이런 배려 없는 사회에 내보이는 자조나 쉼표 같은 장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삶을 살아온 다니엘 블레이크가 스스로 존엄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체득한 자연스러운 센스일 뿐이다. 이 영화는 캐릭터마저도 그런 식으로 존엄을 이야기한다. 죽음으로 끝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그래서 결국 이 시대에 살아남지 못하는 존엄성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적지 않은 영화들은 이렇게 커다란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을 때 극적인 순간을 꺼내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다분히 투쟁적인 시선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도 물론 그렇게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영화의 많은 순간은 투쟁으로 살 수밖에 없는 힘든 삶 속에 빽빽하게 새겨진 인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은 너무나 완벽하기도 하다. 나는 나의 이름을 통해 인간다움을 지칭하고 싶지만, 국가와 시스템 속에서는 일개적으로만 불리는 사람의 이름. 켄 로치가 조금만 더 영화로 행동하고 다음 영화가 또 세상에 나타났으면 좋겠다. 내가 영화를 좋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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