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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Jan 17. 2017

립 반 윙클의 신부

이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이 영화만큼은 오독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립 반 윙클의 신부'는 이와이 월드의 적잖은 영화가 그렇듯, 예쁘지만 때로는 슬픈, 월드 속 하나의 풍경에 지나서는 안된다.


'립 반 윙클의 신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필요한 어떤 관계들, 그러니까 '맺음'이라는 가치가 인간들에게는 정말로 두려운 일이면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절실하고 필요한 일인지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이다.


소심한 성격의 나나미는 사이버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이내 이혼당한다. 남편의 외도를 추적하다가 도리어 본인이 외도를 하고 다녔다는 거짓 씜을 당하고, 그동안 소심하게 쌓아둔 여러 거짓말까지(일례로 결혼식장에 가짜 하객을 가족인 것처럼 동원하는 식으로, 미필적 고의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족에 대한 믿음과 유대를 깬 거짓말들) 시어머니에게 들통나 세상에 버려지게 된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다가 결국 자기 덫에 빠지게 된 그녀. 이런 와중, 믿을 사람 하나 없는 이 잔혹한 세상에서 나나미는 마치 구원자처럼 자신을 도와주는 SNS(영화에서는 트위터와 같은 마이크로 블로그로 나타난다) 지인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여기서 그녀를 쉽게 구원해주지 않는다. 출처 불명의 SNS 지인은 지속적으로 땅을 파내서 그녀를 서서히 수렁으로 밀어 넣는다. 카메라 속 일본의 풍경은 그녀에게 이야기한다. 너는 친구인 척하는 사기꾼(들)에게 지속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다고. 


어쩌다 보니 가짜 하객 아르바이트-거짓 관계의 세계에서 만나게 된 친구 마시로. 같은 여자지만 정서적인, 때로는 에로틱한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그녀. 하지만 그녀마저도 나나미에게는 가차 없다. 친구라고 믿었던 그녀는 사실 나나미를 죽음으로 인도한다. 유방암 말기 환자인 그녀에겐 함께 죽어줄 친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마지막까지 나나미는 진정으로 믿었던 관계에서도 속임을 당한다. 하지만 진짜 속일 수는 없었는지, 영화 속에서 나나미는 결국 살아남고 다시 인생을 처음부터 살아간다.



현실과 사이버 세계, 교차되는 것이 힘든 두 세계를 많은 사람들은 잘 구분하거나 잘 섞어서 살아간다. 이미 현대인에게는 익숙한 두 가지 평행선 위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사이버 세계의 관계는 대부분 인간다움의 대척점에 있는 공간으로 여겨지기 일쑤인데, 그건 단지 윤리적으로 학습된 결과일 수도 있다. 사실 현재 우리의 삶에 맞는 메시지 전달과 대화의 방법은 사이버 세계에 더 최적화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즉 이 영화는 이러한 줄줄이 사탕과도 같은 사기의 연쇄를 사이버 인간관계가 초래한 일종의 희생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인간관계(남편)에 대한 해결사, 돈에 대한 해결사, 나를 필요로 하는 친구, 그러니까 나의 유의미성을 증명해주는 연결의 존재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립 반 윙클의 신부'는 가치의 문제만 생각하자면 쉽게 중첩되기 힘든, 그러나 두 세계의 관통에 성공한 관계 맺음의 중첩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이 영화는 쉽게 생각하자면 두 가지 세계를 동시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묵시록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말 냉정하게 오늘날의 표상적인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면 이와이 슈운지는 영화를 더 잔혹하게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현실이라는 것은, 이렇게 단조롭게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계산적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 본연의 '인간적임'에 반하는 이런 관계의 흐름을 부정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기와 고독을 이야기하기에 최적화된 일본에서 영화를 하는 감독에겐 정말 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이와이가 '립 반 윙클의 신부'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메시지는 단순히 이런 목적에 기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적인 것이 필요하고 인간적인 가치의 대척점에 있는 사이버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이 이 영화가 가지려는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영화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나나미와 마시로가 죽기 전 웨딩드레스를 입고 하는 이야기에 다 담겨있다.


 "나 따위를 위해서. 그 점원이 부지런히 봉투에 물건을 담아 준다고. 이런 쓰레기 같은 나를 위해서. 그 모습을 보면 가슴이 꽉 조여 오면서 괴로워져서 울고 싶어져. 나에게는 행복의 한계가 있어. 더 이상은 무리다 싶은 한계가 그 누구보다 더 빨리 찾아와. 그 한계가 개미보다 작아. 이 세상은 사실 행복으로 가득 차 있어. 모든 사람들이 잘 대해 주거든. 택배 아저씨는 내가 부탁한 곳까지 무거운 짐을 날라 주지. 비 오는 날에는 모르는 사람이 우산을 준 적도 있어. 하지만 그렇게 쉽게 행복해지면 나는 부서져 버려. 그래서 차라리 돈을 내고 사는 게 편해. 돈은 분명히 그런 걸 위해 존재할 거야. 사람들의 진심이나 친절함 등이 너무 또렷이 보이면 사람들은 너무 고맙고 또 고마워서 다들 부서지고 말 걸? 그래서 모두 돈으로 대신하며 그런 걸 보지 않은 척하는 거야. 


어떤 이론은 모든 영화를 욕망과 결핍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문득 이 영화는 그런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사실 이 영화를 보고 하루정도 시간이 지나니 크게 할 말이 없어졌다.

친구라는 존재와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순간들이 생각이 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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