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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Mar 22. 2017

손원평 <아몬드>

표현과 커뮤니케이션이 흘러넘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사람이 말을 하고 감정을 나누는 일은 공동체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단 한 번도 멈춘 적은 없을 것이다. 이런 행위의 가치가 소홀히 여겨진 적도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고 감정의 교감이 없으면 메말라 죽을 것이 뻔하니까.

 

이런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감정을 마구 몰아서 보게 되는 순간들-수 없이 쌓인 카톡 메시지를 본다거나 밀린 SNS 피드를 본다거나 하는 순간들-에는 무언가 과잉의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침묵의 약속이란 애초에 없는, 시도 때도 없이 밀려오는 수많은 푸시들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 같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도' 답장이나 답변을 단지 관계의 지속을 위해 억지로 해야 하는 순간들이 때때로 의무적인 시간들로 다가온다. 


무언가 '현대인의 초상'같은 고민을 <아몬드>의 윤재의 선천적인 고민에 비추어 문득 생각해 보았다. 가능하다면 감정이 타의적으로 무뎌진 사람들, 그중에서도 감정과 공감-인간이 선천적으로 발휘하는 이타심이 어쩌면 선천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회의를 한 번이라도 가져본 사람에게 <아몬드>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아몬드>의 윤재는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아이다. 느낄 수 없어서 감정으로부터 가능한 의사 표현이나 공감도 할 수 없다. 본디 그렇게 태어났다. 학습과 훈련을 통해서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배우면서 살 수밖에 없다. 생일과 크리스마스가 겹친 어느 날, 엄마와 할머니와 명동에 나간 윤재는 불의의 사고로 할머니를 잃고, 엄마는 혼수상태가 된다. 타인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방법'을 알려주던 이가 사라졌다. 이 과정에서 윤재는 별안간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동안은 불가능하기만 했던 감정에 대한 것들을 조금씩 자신의 속 안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 환상적이지만 외로워서 슬픈, 동화 같지만 쓸쓸한 아이들의 보통의 경험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청소년 문학이라고 한계를 짓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어른을 위한 동화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손원평의 <아몬드>는 일견 환상적이지만 우울한 호기심을 유발하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청소년에게는 감정에 대한 이런 상상력이 허구와 상상에 의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른들에게 이런 내용은 어쩌면 지극한 상상이 아니라 이와 비슷한 비극이 현실 속에 이미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타인이 보내오는 많은 감정과 반응, 느낌의 표현이 카톡과 메신저, SNS를 타고 내 머리맡의 단말기를 타고 매일매일 부르르 떨려온다. 이런 감정들은 모두 진심이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과잉은 사람을 피로하게 만든다. 그럴 땐 무언가 학습된 반응과도 같이, 혹은 무조건 반사와도 같이 'ㅋㅋ' 'ㅠㅠ' 같은 답장을 보내기도 한다. 나만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내 편도체는 문제없이 머리에 잘 붙어있는 것 같은데, 이래도 되는 것일까. <아몬드>는 이런 고민을 안겨주는 소설이다. 다행히도 편도체는 잘 붙어있어서 이런 순간들은 현실의 병이 아닌 아주 일시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비록 그런 현실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할지언정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그 아이는 왠지 우리 안에 있을 법한 모습으로 독자의 연상 작용을 돋우기도 할 것이다. 감정을 느낄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소년 윤재에게는 이 문제가 아주 희귀한 병명으로 <아몬드>에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느끼는 것도 지친 우리들에게, 당신도 어쩌면 조금만 더 방심하면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혹은 조금만 더 주변인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이런 무감정이 지극에 달하는 현실이 주변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손원평이라는 작가는 나에게는 감독으로 더 익숙한 사람이다. 내가 좋아하는 몇 개의 한국의 독립영화들이 있는데(물론 그 개수는 예상외로 많을 수도 있다) 그중에 꼭 손꼽힐 영화가 바로 손원평 감독의 <인간적으로 정이 안 가는 인간>이다. 이 영화는 도발적인 제목만큼이나, 도발적으로 인간이 인간을 대할 때의 불편하고 찝찝한 감정을 그야말로 '깨름찍'하게 묘사하고 있다. 인간은 다분히 이성적이고 아름다운 '인간애'가 있는 존엄스러운 존재일 수도 있지만 현실에서 경험하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은 이렇게 거슬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손원평 감독에 대한 이런 강렬한 인상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래서 그가 소설을 냈다고 했을 때 당연히 놀라우면서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그 영화와 같은, 인간적으로 정이 안 가는 무언가를 글로 썼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바로 그 '깨름찍한' 묘사의 탁월함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대는 틀리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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