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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Mar 19. 2017

인생은 오즈 야스지로

오늘 오랜만에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보는데 거의 눈물이 날 뻔하였다.


영화 형식과 스타일 때문이기도 하고 대사의 패턴 때문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상암동 영상자료원에서 영화를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냥 오즈 야스지로니까, 좋아하는 감독이니까 그 자체가 이유가 되기도 하다.


하지만 정말 그런 감정이 들었던 것은 오랜만에 본 <동경 이야기>는 요즘 말로, 무언가 우스갯소리가 된 것 같은 그런 '하이퍼리얼리즘'의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단순히 "효도를 하자", "있을 때 잘하자"라는 교과서같은 메시지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이미 본 영화이기도 하고 아는 내용이기 때문에 인지하고 있는 교훈이 의미적으로 다시금 큰 각성을 준 것 같지는 않다.



<동경 이야기>를 학생 때 보고 약 십여 년 만에 다시 보았다.

너무나 부모의 모습이 크게 나왔다.


영화의 이야기 자체는 가족 전체를 아우르고 있지만, 가족이라고 하는 구성원들이 홈드라마 안에서 가족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부모(노부부)가 있기 때문이다. 이건 등장인물의 구성이 부모와 슬하의 자식들, 그리고 그 슬하의 또 손자들-끈끈한 하이어라키 구조로 되어있으니까 하는 필연성에 기대어하는 말이 아니다. <동경 이야기>의 부모는 가족이라는 관계가 주는 슬픔과 기쁨, 기대와 섭섭함 같은 감정과 서사의 폐곡선들을 정말이지 이야기가 아닌 흐름으로써 가능하게끔 하는 중심 존재로 그려진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의 발생과도 같은 동기를 굳이 만들어서 보여주지 않고, 관계 그 자체가 이유가 되어 삶의 한 순간에서 불현듯 시작하더니 주욱 이어지고 끝난다. 정말로 누군가의 실제 혹은 보편적인 삶을 이야기하듯이.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정말이지 자주 일어나는 섭섭한 상황들, 아쉬운 말들. 이런 상황과 말들이 <동경 이야기> 뿐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가능하고 이해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그냥 부모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눈물이 날 뻔한 것은 그런 수많은 곤란한 상황에서도, <동경 이야기>의 노부부는 다른 방식으로의 사랑의 방식을 찾는다. 요즘 말로 이야기하는 그런, 진한 '사랑'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일 수도 있겠지만 본디적으로는 부모가 자식들을 위하는 마음이라는 건 역시 사랑일 것이다.


오늘도 나는 엄마한테 함부로 말을 했고 또 미안했다. 그래서 오후엔 엄마가 하고 싶은 것을 같이 해주었고 이야기도 조금 했다. 마음에 안 들고 나의 가치관과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역시 힘들지만 그 최정점에 있는 사람(들)이 때로 부모님이 된다는 것은 역시 매번, 역시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즈 야스지로 영화는 <꽁치의 맛>이다.

물론

언제 어떻게 어떤 영화를 봐도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가 단순히 영화일 수는 없다.


나이를 먹었는지 아니면 오늘 엄마랑 또 한판 싸워서 그런지 오늘따라 <동경 이야기>의 많은 순간들이 슬펐다. 그런데 정작 그런 부모 자식에 대한 대사가 아닌, 이 대사가 가장 슬펐다. 아직 나는 경험해본 것은 아닌데도 그랬다. 시아버지가 자신의 아들과 사별한 젊은 며느리에게 하는 말이다.

이상하구나.
자식들은 여러 명인데 그중에서도 네가 우리를 가장 많이 위해줬어.
친자식도 아닌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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