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달 Mar 25. 2017

텍스트 이상의 이미지가 필요한 <미스 슬로운>

'조금만 이렇게 하지'라는 생각이 드는 영화들은 정말 못 만든 영화보다도 더 아쉬움을 준다. 그 '조금' 때문에 단상과 단평의 노선이 갈리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소극적인 느낌으로 얘기하는 조금이라는 단위는 영화를 보는 시간 안에선 단지 몇 초, 몇 분이 누적되는 순간들일 뿐이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이후에는 러닝타임 전체를 잠식할 만큼의 위력을 가지기도 한다. 영화의 모든 순간들을 정성스럽게 만드는 영화인들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미안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미스 슬로운>을 보았다. 나름대로 탄탄한 만듦새와 멋진 캐릭터로 완성된, 외연적인 우아함으로 채워져 있는 영화다. 거대 권력에 맞서 싸우는 여성 로비스트의 이야기라니, 게다가 그 여성은 겉으로는 흠잡을 데 없이(까지는 아니고 극악의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의 끄트머리에 으레 존재하는 정신의 아킬레스건도 있지만) 완벽하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의 크기도 크다. 그래서 사소한 아쉬움은 모두 이해 가능한 선에 있기는 하다. 그러나 부분마다 드러난 바로 그 '조금'이 누적되면서 <미스 슬로운>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이 안타까움이란 <미스 슬로운>의 이미지 경험에 대한 사소한 아쉬움들이다.


그래서 그냥 지나가듯 이야기하고 싶은 <미스 슬로운>에 대한 아쉬움들과 그래도 볼만한 이유들.



1) 이 외국어 영화의 무지막지하게 많은 대사(라기보다는 자막)들을 온전히 따라 읽고 스텝을 따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너무 많은데 또 빠르다. 미국 실정법의 역사와 정치적 이슈를 온전히 자막으로만 읽고 이해해야 하는 외국의 관객들에게 이 영화의 텍스트는 너무 빨리 지나간다. 의미 전달이라는 목적은 지키고 번역을 조금 간결하게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2) 이 영화는 로비스트의 이야기지만 법정 드라마로 도드라지는 장면도 많다. 제시카 차스테인의 멋진 연기는 법정에서의 신문 중 분노랄지, 고백이랄지하는 장면들에 적잖이 할애되어 있다. 사회 시스템과 관련한 이슈와 이를 둘러싼 각 진영의 알력 싸움은 대사를 통해 나열되면서 정치 스릴러다운 면모도 충분히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미스 슬로운의 징후적인 결핍을 대조적으로 자주 보여주면서 심리 스릴러의 긴장감도 놓치지 않는다. 사실 <미스 슬로운>은 주인공의 심리적인 강박에서 시작해 그 강박이 일종의 계획된 '큰 그림'이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함으로써, 영화 내내 산적되어 있던 위기들을 간단히 해결하기도 한다.


즉 <미스 슬로운>은 관객이 긴장감을 늦추어선 안 되는 틈 없는 플롯과 캐릭터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독해의 요소들이 영화 안에서 유기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대사 이외의 시각요소들을 활용하여 연결을 매끄럽게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미스 슬로운>의 많은 시간들은 내내 비슷한 공기를 머금은 사무실에, 호텔에, 서류를 살펴보는 공간에 할애되고 있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 대부분의 시간들은 미스 슬로운에게 닥친 '텍스트적인' 위기 상황으로 채워지고 결국 '대사'로 해결되는 무수한 시간들로 남겨진다. 보다 더 심리적인 묘사를 공간에 부여했더라면 이러한 지루한 구성을 떨쳐버릴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든다.

 


<미스 슬로운>에 대하여 이런 긴 이야기를 굳이 앞에서 하는 이유는 역시 영화를 보기 전 가졌던 큰 기대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볼 만한 이유를 이야기하자면.


원탑 여주인공으로 제시카 차스테인이 출연했고, (굳이 젠더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지만) 여성영화의 결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몇 가지 굵직한 명분도 있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팽팽한 플롯도 러닝타임 내내 유지된다. 나와 우리 가족의 삶과 직결된 치안의 문제가 갈등의 핵심이고, 이러한 국민의 권리를 각각의 진영의 논리로 수호하기 위한 게임이 영화를 지탱하고 있다. 당대적으로 생각해볼거리 역시 충분하다.


영화의 일부적인 특색을 가지고 총체적인 인상을 가늠할 바로미터로 본다는 건 무언가 미안한 마음까지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편의를 버릴 수 없는 이유는, 영화를 보고 난 후 나의 시공간에서 떠나버린 영화를 가장 효과적으로 붙잡아둘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미스 슬로운>의 특색이라 할 수 있는 '밋밋하지만 빽빽함'에 대한 아쉬움은, 이 멋진 영화의 묵직한(?) 포스터가 이미 암시하고는 있어서 <미스 슬로운>을 선택하고 지지한 관객에게는 자칫 아쉬워 보이는 면면들도 장점으로서 소구 되기는 할 것이다.


나는 사실 <미스 슬로운>의 포스터도 조금 아쉽기는 하다. 스틸 사진으로 충분히 전달한 메시지가 이미 있는데, 포스터라고 별반 다르지 않은 채 유사 복제된 것 마냥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포스터에서 이만한 압도감을 줄 수 있는 배우도 흔치는 않다. 역시 제시카 차스테인이 <미스 슬로운>을 이만큼 하드 캐리 한 데에는 논란의 여지는 없을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손원평 <아몬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