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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Jun 08. 2017

다르덴 형제 <언노운 걸>

당신은 얼마나 제대로 살고 있나요?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어김없이 던지는, 어김없는 질문이다. 이들의 영화는 매번 다른 상황을 다루지만 마음속에 남기는 질문은 항상 같다. '뭐 이 정도면 피해 안 주고 잘 사는 중인데' 왜 이렇게 불편한 질문을 남기는 것일까. 사회의 원칙에 나름대로 순응하고 사는데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 


무시하고 살 뿐이지 대부분의 일상은 제대로 사는가에 대한 질문이 언제나 가능하다. 우리는 그저 무시할 뿐이다. 생활 속엔 무수하게 많은 윤리적 문제가 있고, 여기서 완벽하게 선하지 못한 인간은 미안함과 부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언노운 걸>은 이런 질문들을 빠르게 던지고 상황을 보여주면서 본론으로 들어간다. 


동네 병원에서 임시로 일을 하는 의사 제니는 야간 근무 시간이 끝난 후 울리는 병원의 초인종 소리를 무시한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가 환자든 뭐든 간에 진료시간은 끝났기 때문이다. 다음날 동네에서는 어느 이름 모를 흑인 소녀가 죽은 채로 발견된다. 그 소녀는 성매매를 원하는 남자에게 쫓기던 중 제니가 일하는 병원의 초인종을 누른 것이었는데, 은신에 실패한 소녀는 이리저리 도망을 치던 중 공사현장에 몸을 숨기려다 자재 더미에 걸려 넘어져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우연한 사고일 뿐이지만 죽음에 이르게 한 순간들 속 나의 이기심으로 소녀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에 제니는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는 그 이름 모를 소녀의 마지막 존엄을 지켜주기로 한다. 이름만이라도 찾아서 그녀의 가족을 찾고, 무명으로 버려질 묘지를 가족들이 수습할 수 있도록. 그러는 동안 제니는 (자신뿐만이 아닌) 그 이름 모를 소녀를 내팽개친 수많은 사람들의 이기심을 그들 자신의 고백으로 듣게 된다.


<언노운 걸>은 작정하고 파렴치와 몰염치를 보여주면서 '이런 행위는 정말 악'이라 하지 않는다. 그저 관계를 바라보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저마다의 고백-이유를 들어줄 뿐이다. 이건 좀 괴로운 방식인데, 선의 절대성을 억지로 내세우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이런 이유들의 합리성과 불합리성을 스스로 판단하게끔 하는 사실이다. 여기서 내가, 당신이 이랬다면 더 좋았을 것을.. 이런 우리들의 불편한 마음은 등장인물과 동일시하는 동안 일종의 부채의식으로 남는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매번 다른 상황과 다른 사건으로 다른 질문을 던지지만, 피할 수 없게도 그 질문들이란 항상 인간의 약점과도 같은 우리의 숨겨진 이기심의 한끝을 건드린다. '이해타산과 상황을 고려한 나의 최선을 뭐라 할 수 있겠어'. 그런데 이런 이기심은 때때로 우리를 비윤리의 절벽으로 밀어 넣는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정말로 그 비윤리의 절벽에서 우리를, 그리고 그들 영화 속의 주인공을 밀어 떨어뜨리게 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끝에 슬쩍 내몰 뿐이다. 여기서 내가 떨어지느냐, 혹은 떨어진 사람을 구하느냐, 떨어지려는 사람을 붙잡을 수 있는가 등등. 


그렇다면 고구마 백개 수준의 미안함을 머금은 우리는 영화를 본 이후, 영화를 빠져나온 이후 새로운 사람으로 막 쉽게 회개할 수 있는가. 그것 또한 불가능하다. 산다는 건 무언가 보이지 않는, 괄호 쳐있는 틈새가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틈새에 사건과 사고가 틈입하면 우리의 의도와는 다르게 미처 고려하지 못한 나의 최선은 타인을 배려하지 못한 이기심이 되어 그 자리를 채운다. 


제대로 살기 위해서 우리가 최소한으로 해야 하는 것은 그래서 언제나 최고의 선에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 이런 부채의 상황이 도래했을 때 이것을 미안해하고, 갚을 줄 아는 그런 마음의 동기와 행동 그 자체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볼록거울과도 같다. 아주 작은 상황을 볼록거울로 보여준다. 그리고는 다시 그 볼록거울을 우리 제 자신에게로 포커스 한다. 여기서 과연 얼만큼이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는 저마다 다르다. 나로 이야기하자면 거의 이런 질문들에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로울 수 없는 관객은 그저 다르덴 영화의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다. 단지 그때그때의 상황을 대리로 보면서 이입하고 간접적으로 반성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 과연 얼마나 우리들은 선한 기적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한 뼘만큼만 더 그런 생각들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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