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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Jun 22. 2017

<박열> 그러나 더욱.. 이준익 감독을 생각하며

이준익 감독은 동시대적이면서도 지금보다 앞선 20세기 시대의 유물 같은 것을 지키고 있는 감독이다. <사도> <동주> 그리고 <박열>까지,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지금의 우리가 이 시대를 살면서 꼭 보고 싶고 또 말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혹은 영화에 빗대어 하소연으로 하고픈 가슴속 설움을 한껏 품은 채 도착하고는 한다. 정말이지 그 이야기들이 꼭 필요한 시간에 잘 도착한다. 이건 이준익 감독이 동시대의 관객들이 원하는 바를 탁월하게 포착하는 그만의 능력이기도 할 것이다. 


이준익 감독은 결코 연차나 경력을 무기로 하여 노련미와 관록을 브랜드로 내세우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시대를 적재하는 것이 아닌 시대를 관통하는 감독으로 호흡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준익 감독하면 무언가 20세기의 감독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이하다거나 기인 수준으로 자기만의 방식을 고집한다거나, 독단적인 작가관이나 감독관을 의지적으로 가지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그렇다. 단 한번 그런 고집이 느껴진 적이 있었지만.. 아무튼 이준익 감독이 작품을 착상하는 방식, 영화라는 매체가 어떤 이야기를 대중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그의 고민은 20세기가 저물면서 함께 사라진 지난 시대 감독들의 정신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는 장편 상업 영화를 참 성실하게 만들지만 어쨌든 대중과 함께하는 것이 영화라면, 바로 그 영화는 시대의 어떤 빈 곳을 읽어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꼭 서사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서두에서 말한 '동시대적'이면서도 '전 시대의 유물 같은 정신'을 가진 이준익 감독에 대해 이야기한 두 가지 표현은 같은 뜻을 향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대놓고 시대에 대한 호소를 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우리의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그동안 그의 영화들은 어김없이 그런 역할들을 잘 해냈다. 이건 거의 '역할'에 가깝다고 생각될 정도로,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실화와 역사를 레퍼런스로 해서 지금 우리의 시대를 재해석할 수 있는 탁월한 도구로 제공된다. 그러니까 지금의 우리가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는 막연한 불만 혹은 설움 같은 것을 지난 역사를 가져와서 대신 풀어주는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박열> 또한 이런 역할을 하는데에 결코 게으르지 않은 영화다. <박열>은 일본 식민지 시대, 일본 땅으로 건너간 독립운동가 박열의 기개 넘치면서도 통쾌한 삶을, 현실의 비극을 거의 다 깎아내릴 수준의 정신적 힘으로 지탱해나가며 그려낸 영화다. (이 영화가 혹시 기대보다 좀 흥행이 되지 않는다면, 안타깝게도 쳐내야 하는 부분을 미쳐 다 쳐내지 못해 늘어진 러닝타임이 원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 본다). 


박열이 아나키스트이기 때문에, 혹은 그의 파트너로 등장한 후미코라는 너무나도 시대를 앞선 인물-상상하기 어려운, 거의 거짓에 가까운 일본인이 자국의 제국주의를 비난하며 폭발적인 아나키즘을 발산하기 때문이라는 정직한 이유만이 그런 정신적 힘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전작 <동주>가 그랬듯, 지금 우리의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이야기, 그리고 그것을 영화로 풀고자 하는 이준익 감독의 의지까지 주인공의 의지와 더불어 묻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열>은 역시 <동주>가 그러했듯이 영화의 전개상 다소간 필요가 없어 보이는 동어반복적인 순간들이 잊을만하면 겹쳐서 등장한다. 이런 겹치기 수법은 사실 이 영화의 메시지를 잊는 순간에는 지루한 재방송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준익은 이러한 순간들을 기어코 메시지로 만들어낸다. 이 영화가 단지 실존인물의 실화이기 때문에 동어반복이 팩트로서 용인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이준익 감독은 <박열>의 주인공 박열의 목소리를 통해 반복적인 이야기와 예상할 수밖에 없는 슬픈 어떤 순간들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런 영화적 순간들을 쌓고 쌓아서 메시지로 쌓아 보여주는 데에는 거의 거장에 이른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세련된 방식으로 반복과 차이를 만들어낸다. 물론 <박열>은 <동주>만큼의 세련되게 그 방법을 실현하지는 못하였다. 그러지 못한 이유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준익 감독이 이런 세련미가 빛을 발하는 순간은 '남자의 외로운 슬픔'이 존재했을 때 가능한데, 사실 이 영화는 그렇게 외롭게 슬픈 순간이 없어서인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감독에게 칭찬인지 악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준익 감독의 연차와 작품 편수 대비하여 이만큼 꾸준하면서도 여전한 톤을 유지하는 감독은 드물다. 이준익 감독은 여전히 과하지 않지만, 슬픔을 잔잔히 다룰 줄 알고, 그 와중에도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규칙적으로 지킬 줄 알며, 배우의(특히 남자 배우의) 홀로 된 외로움을 잘 포착할 줄 안다. 홀로 된 외로움이 여전히 영화 안에서 유효하다는 것은 사실 요즘 시대의 영화들에게 있어서는 조금 시대착오적이기까지 하다. 남자의 홀로 된 외로움이 영화 안에서 구차하지 않게 묘사되기 위해서는 일종의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로를 구걸하지도 않으면서, 남자이지만 슬픔에 쑥스럽지 않을 수 있는 용기다. 


이준익 감독은 항상 이런 용기를 지지해왔고 매번 그런 순간들이 영화 안에 태어났다. 이렇게 그의 영화를 보다 보면 이런 공통된 지점들은 무언가 티 없는 순수함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번에는 좀 무난한데, 감정적인 울림이 없는데 하며 아쉽다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다음 영화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준익 감독의 외로운 슬픔을 다시 한번 더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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