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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Jul 05. 2017

옥자

봉준호는 역시 순수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봉준호의 영화는 <플란다스의 개>이다. 첫 번째 이유는 웃기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생명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유는 선과 악에 대한 비유,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대한 독단과 판단을 거창한 난장과 해학으로 풀지 않아서이다. 쉽게 말하면 해석을 위한 문제 내기, 비유하기에 골몰하지 않고 그저 솔직했기 때문이다. 


영화에 있어 해학이라는 건, 이 작품이 당신들을 향해 이렇게 팔딱팔딱 뛰고 있고 당신들과 호흡하며 생동하고 있다는 점을 어필하는 데엔 효과적이다. 하지만 이런 역동성이 솔직을 반드시 담보하지는 않는다. 


영화를 보다 보면 이런 게 느껴지는 영화들이 있다. "이 장면은 꼭 이렇게 찍고 싶었다" 하는 감독 마음속 케케묵어 있었던 콘티가 느껴지는 영화들 말이다. 그게 결국 영화가 되었구나 하고 느껴지는 영화가 있다. 이렇게 기어이 영화로 태어나면, 그 영화들은 작위적인 해학보다 더 진솔한, 웃긴, 그러나 숨길 수 없는 '순수함'을 가지게 된다.


내가 그의 영화 중 <플란다스의 개>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케케 묵음이 보이면서 여러 가지로 순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정말 웃기기 때문이다. 


<옥자>를 본 이유도 이런 영화에 대한 취향 때문이다.

 

<옥자>는 순수의 발견이 가능한, 그런 메타포들이 많은 영화다. 솔직히 말하면 기대만큼 웃기지는 않았다. 그런 웃음을 껴넣기엔 영화의 시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이다. 옥자라는 존재를 설명하는 데에 2시간도 너무 버거운 시간이었나 싶다. 그래서 그 많은 설명들은 때때로 포기된다. 주인공들은 그저 "옥자야~~" 하고 그를 찾아 헤매이며 그가 등장하여 존재적으로 설명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무튼간에 <옥자>의 기능적인 특징을 굳이 이야기하는 건 입 아픈 일이다. 미학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문화인류학적으로도, 결국엔 철학적인 함의도 모두 충분하다. 데뷔작이 너무 위대했을 뿐, 그래서 옛날만큼의 충격은 아니긴 하였지만.. <옥자>가 그 옛날 <플란다스의 개>에서 발견했던 순수함을 어떤 의외적인 순간들에서 그래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다. 거의 변희봉 덕분이기는 하지만.




순수함을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좋다. 인간은 본래 순수하게 태어났으니까 말이다. 순수함의 본질은 어떤 모습인가. 인간의 제한된 경험에 한하여 찾아본다면 그건 자연이다. 그래서 순수함을 보여주려 할 때 그것은 곧 자연일 수밖에 없다. <옥자>는 결국 이 이야기를 하려고 그 많은 전 지구적인 관계들이 나열되어 있는 영화다.


우리는 모두 자연이 더 자연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런 영화가 등장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학습된' 환호를 하더라도, 부지불식간에 펄펄 끓는 우리의 피가 그곳을 향해 흐르기 때문에 환호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인가 생각한다. 이 본연의 정신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영화는 가장 인공적이기는 하지만 사람과 동물, 그리고 이들의 눈물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순수함을 이야기하는데 좋다고 생각한다. 


<옥자>는 쓰지만 달고, 그래도 착착 감기면서 이름은 또 촌스럽고 독특한 계피 같은 영화다. 어디서는 시나몬이라고 부르고, 개중에도 '커피에 토핑 하는' 시나몬이라 부르기도 하겠지만.. 밥상머리에서 티브이를 보는 안서현과 옥자, 그리고 변희봉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도 봉준호의 영화는 또 그렇게 볼만하고 순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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