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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Jul 12. 2017

우리를 대신해 그 때를 목격해준 택시운전사

<택시운전사>는 (영화의 완성도나 취향과는 상관없이) 보기도 전에 '울겠구나' 싶은 영화였다. 광주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나 경험, 인간적인 분노나 불의에 대한 저항심 때문은 아니고 후천적으로 스며든 죄의식 때문에 그렇다. 


<택시운전사>를 보고 우는 사람 물론 많을 것이다. 광주에 대한 기억 때문에, 주인공 만섭을 따라가는 카메라와 외신기자 피터의 카메라가 좇은 1980년 광주의 풍경 때문에, 총구 앞에 놓인 우리 이웃들을 향한 인간적인 연민 때문에, 서사 자체의 슬픔 때문에 등등.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눈물을 부르는 영화가 꼭 최선의 영화는 아니라는 점이다. <택시운전사>는 장훈 감독의 가장 잘 만든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영화다>와 <의형제>가 톡톡 튀면서도 매 순간들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떠올려 보면 더욱 그렇다.



물론 정해진 결말과 예견된 비극을 서사적으로 기발하고 새롭게 만드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정해진 아픔을 그저 소시민적으로만 구성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택시운전사>의 제일 큰 아쉬운 점이란 그런 예상 가능한 슬픔과 웃음의 규칙적인 나열이다. 이런 슬픔과 웃음의 규칙성 덕분인지 2시간이 넘는 이 영화는, 고른 리듬을 타면서 지루할 수 있는 순간까지도 규칙적으로 극복해낸다. 자칫 다큐가 될 수 있는 순간들은, 비슷비슷해 보일 수 있는 장면들은 짧게 커트로 쳐내어 연속과 불연속을 넘나들며 지루함을 빗겨나간다. 그런데 이렇게 영화가 짧지만 고른 리듬으로 내내 이어지면 대사가 울림 있게 튀어나오면서 우리를 흔들어 깨울 법도 하다. 하지만 <택시 운전사>엔 그런 대사 또한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택시운전사>는 새로운 장점을 발현해내기에 이른다. 이런 구성 덕분인지 내내 밋밋한 <택시운전사>의 대사 속에서 송강호의 연기는 더 도드라진다. 슬프기는 해도 예상은 되는, '르포 속 장면'에 그칠 수 있을 법한 그런 재현의 순간들을 다시 새롭게 목격해보라 일깨워주는 것은 바로 그의 표정과 눈물이다. 1980년 5월 서울을 사는, 진짜 소시민스러운, 하지만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일깨우는 목격자 송강호의 얼굴.



그의 얼굴 덕분에 1980년 광주를 그린 이 영화는 왜 <택시 운전사>라는 제목일 수밖에 없는지, 그 존재론적 당위성이 획득되기까지 한다. 그의 얼굴 덕분에 영화는 생기를 얻고 1980년 광주의 풍경이 다시 현현하며 생동감 있게 움직인다. 


송강호의 얼굴은 우리가 지난 37년간 잊고 있었던 시절을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데 기름을 붓는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것은 37년 전 5월을 되새기며 연례행사와도 같은 애도와 묵념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가, 그래도 계속할 수 있는 일은 그때의 풍경을 기억하고 감정이든 무엇이든 표현하는 것이다. 그의 얼굴처럼 말이다.



영화 시작 전, 주연배우와 감독의 포토월 인사와 무대인사가 있었다. 짤막하게 인사를 하며 간단하게 영화 소개를 하는 자리였다. 으레 그러하듯 열심히 찍었다, 잘 봐주세요 이런 이야기를 돌아가면서 했다. 그런데 송강호는 매우 의식적이면서도 조심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웃으면서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라고 포토월 인사와 무대인사 때 꼭 같은 이야기를 두 자리에서 했다. 제 차례로 돌아온 마이크를 받고 스치듯이 한 말이었지만 두 번이나 굳이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영 이상했다. 


역사 재현과 고발의 엄숙 주의를 경계하는 듯한 그의 말은 거의 이렇게 들렸다. <택시운전사>를 다큐멘터리 혹은 참상의 재현, 분노와 아픔의 되새김으로 보지 말았으면 하는 것 같았다. 80년 5월 광주를 통과한 평범한 택시 운전사의 마음이 개인적인 것에서 시민과 함께 한 연대로, 나아가서는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바로 그 마음의 움직임만을 따라가 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사실 이건 영화가 단지 특정 주인공의 관점을 내내 유지하고 물리적으로 유지한다고 해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주인공의 마음에 공감하거나 이입되거나, 혹은 설득되어야 하니까. 송강호의 얼굴은 그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다시 얘기하지만 이 영화의 방점은 (단순히 광주의 고증이 아니라) '택시 운전사'에 찍혀 있다. 그의 얼굴에 설득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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