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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Oct 17. 2017

[biff] 미세스팡


http://www.biff.kr/kor/html/program/prog_view.asp?idx=30128&c_idx=304&QueryStep=2



그동안 수 없이 많은 영화를 나도 보았고 이 글을 읽을 소수의 사람들 역시 많은 영화를 보았겠지만, 왕빙의 미세스팡은 그중에서도 정말 '이상한' 경험의 영화가 될 것이다.


누군가가 죽어가는 시간을 본다. 팡슈잉 할머니 혹은 팡여사. 죽어가는 그의 과정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가족들은 그에게 닥쳐올 죽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 자신들의 삶을 그냥 살아감과 동시에 그의 죽음 이후의 절차를 어떻게 해야할지, 지금 임종이 다가오는데 누구는 왜 안왔고 지금 어디서 뭘하는지, 도박 판돈은 얼마였고 낚시는 잘되는지 어쩌구 저쩌구 하는 얘기를 그냥 아무렇지 않게 한다. 이 또한 미세스팡의 죽음과 관련된 과정은 아니다. 이전부터 그래온 생활을 그대로 이어서 할 뿐이다. 그러는 동안 그는 죽어가고 있지만 죽음의 어느정도 앞까지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이렇게 파악이 안되는 동안은 가족들의 시간들이 이 영화를 점유하고 있다. 이보세요 지금 가족이 죽어가고 있다고요, 라고 극영화의 관객들은  스크린에 돌을 던져 알려주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 가족들은 알고 있다. 실제이기 때문이다. 그가 죽을 것도. 나는 지금 그 시간을 이렇게 보내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는 것도.


미세스팡은 정지된 시간 속에서 정지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릴 뿐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필름에 정지되어있는 그의 살아있던 얼굴을 바라본다. 이미 죽은 미세스팡의 죽어가는 모습을 대신 관객들이 봐준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과거를 제례처럼 봐주는 체험일 뿐이다. 관객 속의 나는 스크린을 쳐다보다가 불현듯 관객들의 뒷통수들을 보았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느끼고 싶어서 지금 이곳에서 미세스팡의 정지된 눈물을 보고 있는건가? 누군가의 죽음이 담긴 다큐멘터리를 추모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보는 것 자체가, 이것 또한 세상에 대한 예의가 맞다면, 그럼 어떻게 보아야하는 것인지 아직 잘 알지 못하겠다. 영화의 제목은 원제가 더 적합한 것 같다. <팡슈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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