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자취 인생을 청산하고, 당근 40.5도를 달성하다.
길고 길었던 자취 생활을 청산하고 신혼집으로 이사를 했다. 옷, 책, 주방용품만 가져가고 자취 생활에 사용하던 가구와 가전은 다 처분할 예정이라 이삿짐센터를 안 부르고, 셀프 이사를 하기로 했다. 퇴근 후와 주말 동안 내 작은 삼공이를 이용해 부지런히 짐을 이고 지고 날랐다. 무식한 나의 뇌가 손과 발을 고생시키기 위한 최고의 선택을 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자취짐은 맞지만, 나는 자취를 무려 12년 동안 했던 것이다. 헌 집에는 에어컨도 없어서 해가 진 이후에 가서 야반도주 느낌으로 이삿짐을 정리했다. 끝도 없이 나오는 내 10대, 20대, 30대의 흔적들. 일에 이사에 치여 반쯤 넋이 나간 나에게 친한 친구는 무겁고 힘든 일은 혼자 하려고 하지 말고 남편한테 시키라고 말했다. 난 막내아들 같은 그가 고생하는 게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답해 친구의 뒷목을 잡게 했다. 무남독녀 유아독존 세상에서 자기밖에 모르던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참으로 놀랍다던 그녀의 촌철살인. 남들한테는 마치 나 혼자 순례길 걷는 것처럼 떠들어댔으나, 실상 힘든 건 남편이 다했다. 사는 곳의 의미를 상실한 도깨비 시장 같은 헌 집에서 막둥이 남편은 내가 하기 싫어하는 온갖 궂은일을 하며 고생했다. 그는 우리가 집 장만, 결혼준비, 혼수가전을 모두 다 따로 준비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이 세 가지 과업을 동시다발적으로 준비하면서 파혼하지 않고(?) 무사히 결혼까지 골인한 커플들은 찐사랑이 맞다는, 꽤나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구질구질한 잡동사니를 이고 지고 가려는 내게 그는 이건 제발 버리고 그건 이 기회에 정리하라고 끊임없이 설득했다. 내게는 패피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옷이 꽤나 많았는데, 예순이 훌쩍 넘은 엄마가 스무 살에 입던 옷을 부여잡으며 나는 울부짖었다. 내가 예전에 감명 깊게 봤던 크리스티앙볼탕스키 전시회에서 몸에 가장 가까이 있던 옷은 인생의 한 시점에 있는 존재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걸 버리는 건 엄마의 20대와 나의 20대를 동시에 버리는 것과도 같은데. 옷을 버리는 건 그 시절의 한 존재가 사라지는 건데.* 내가 차곡차곡 쌓아둔 지난날의 카르마를 놓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골든레트리버 마냥 순하고 착한 내 남편이 어느새 어금니를 앙 깨물며 말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한 달이 넘게 야반도주 이사를 계속하게 되었지만, 이미 자취 업보의 절반 이상을 새집으로 옮겨 놓은 애매한 상태라서 셀프 이사를 멈출 수는 없었다.
쓸만하지만 새 집으로 가져갈 수 없는 물건은 부지런히 당근 했다. 열심히 당근 거래를 하며 적정한 타이밍에 쿨거래할 수 있는 가격대를 설정하기 위한 얕은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판매보다 나눔을 더 많이 했는데, 당근 나눔을 통해서도 소소한 깨달음이 있었다. 첫째, 무료 나눔을 올리자마자 채팅이 스무 개도 넘게 온다는 것은 내가 단돈 5000원이라도 받을 수 있는 물건을 충분한 시장조사 없이 나눔으로 올렸음을 뜻하는 것이다. 둘째, 5000원 대신 이 물건을 당장 빨리 내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비용을 지불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하다. 셋째, 내게는 그 쓸모를 다 했으나 이 물건이 필요한 이가 우리 동네에 한 명은 반드시 나타난다. 넷째, 내가 정리하고 싶어서 나눔을 했는데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받는 일은 퍽 기분이 좋다. 약속 시간을 잘 지켜서 나의 업보를 데려가 준 이웃들과, 서랍장 나눔이 고맙다며 포카칩을 건네 주신 다정한 아주머니 행복하시길.
셀프 이사는 거의 두 달이 지나 어느 정도 갈무리가 되었고, 나는 당근 온도 40.5도를 달성했다.
헌 집 살림은 버리고 새집 살림은 정리하는 시간을 꽤나 길게 가지며 끝없는 선택과 마주했다. 버릴 것과 팔 것 구분하기. 진작에 버려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던 것을 이제는 놓아주기. 미래에 최대한 버려지지 않을 최선의 살림살이 찾기. 눈탱이 맞지 않을 새집 청소 업체 고르기. 거실 타일과 어울릴 최고의 줄눈 색상 고르기. 우리에게 꼭 필요한 스펙의 가전 선별하기. 고르고 고른 냉장고에 딱 맞는 냉장고장을 만들어줄 업체 찾기. 온갖 물건을 놓을 최적의 위치 정하기.
연애때와는 또 다른 서로의 모습을 많이 발견하며 내게는 이 기간이 우리 관계에 있어 꽤나 의미 있는 전환점으로 느껴졌다.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굉장히 세밀하게 알아가는 시간을 보냈다. 뭐 하나에 꽂히면 과하게 몰입하는 광기를 지녔다는 점에서 우리 부부는 너무나 닮았고, 디테일한 부분 하나하나에서는 생각보다 서로의 의견이 많이 달랐으며, 나의 남편은 대부분 져주지만 절대 물러서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에 관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해서 되돌아보게 된 시간이었다. 집, 결혼, 살림장만을 다 따로 할 수 있어서, 긴 시간 여유롭게 원하는 대로 준비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고 감사하다.
내가 버리고, 끝없이 당근 했던 나의 옛 친구들. 나의 과거. 나의 업보. 내가 그들을 처음 만나고 선택했던 그 당시에는 그것이 나의 최선이었겠지.
최선을 다해서 고르고 골랐던 새 살림살이. 부지런히 또 쌓아 올리고 있는 나의 지금. 언젠가 또 시간이 흐르고 흘러 정리해야 할 짐이 될 날이 올까.
소소하고 평안하다. 매일 나를 파안대소하게 만드는 다정한 반려와 함께 지내는 지금이 너무 소중하다. 공소리에 빵 터져서 낄낄대는 와중에, 이 행복이 갑자기 사라지면 어쩌나 두려운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뜬금없이 남편에게 나보다 먼저 죽으면 저승까지 쫓아가 죽여버리겠다 말하고, 남편은 넌 또 갑자기 왜 이렇게 재수 없는 소리를 진지하게 하냐며 가벼이 나를 웃겨버린다.
행복이 스쳐가는 찰나마저 아쉬워서 전전긍긍하는 나. 욕심이 참 많아서 버리는 것에도, 선택하는 것에도 집착하는 나.
손에 잡을 수도 없는 다정한 시간을 붙잡고 싶어 하는 스스로가 우습지만, 내게는 지금의 모습이 최선이다.
*크리스티앙볼스키는 무언가를 간직하려 할 때마다 결국 그것을 죽이는 꼴이 된다는 말도 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