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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뜻지 Feb 22. 2022

아이들이 학교에 몇 번 나왔나요?

불확실하다는 것만이 확실한, 새 학년 새 학기를 앞두고

 발령받은 새 학교 출근일이었다.

새로운 지역,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눴다.

한 해를 함께할 동학년 선생님들과 통과의례처럼 개인 신상에 관한 사담을 짧게 나누고 난 후에, 학사일정과 등교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화두에 올랐다.


 "올해는 원격수업이 있을까요?"

 "전면 등교 원칙이라고 하더라고요. 물론 상황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교육부 발표로 봐서는 전면 등교 기조로 갈 거 같은데, 행여나 코로나 상황으로 못 나오게 되는 아이들은 어떡하죠?"

 "저 전임학교에서는 작년에 그냥 다 실시간 줌으로 했어요. 등교 수업일에 학교를 못 나와도 집에서 줌 켜고 들어와서 교실에 있는 친구들이랑 같이 수업했어요. 수업도 듣고, 발표도 다 하고."

 "저희는 이학습터 제공하긴 했는데, 콘텐츠 제공보다는 실시간 쌍방으로 집에 있는 아이도 같이 진행하는 게 더 나을 거 같아요."

 "고학년은 줌이 낫죠."

 "아직 공문은 안 내려왔지만, 학기초에 학교장 재량으로 원격수업을 허용한다는 얘기도 있어요."

 "아... 그럼 아직 불확실한 거였네요."

 "혹시 작년에 아이들이 학교에 몇 번 나왔나요?"

 "저희는 격주 등교였어요."

 "저희는 주 2회 대면 등교, 주 3회 원격수업이었어요."

 "저희는 홀, 짝 번호로 나누어서 주 1회 등교했어요."

 "저는 전면 등교요. 코로나 터지고 계속 저학년만 맡아서, 원격수업을 아예 해본 적이 없어요. 큰일 났어요."


 올해 동학년 선생님들은 나를 포함해 모든 구성원이 전입 교사이다. 그래서 현재 학교가 작년에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었는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타 지역, 타학교의 다양한 등교 방법'에 대한 각양각색의 데이터를 모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라면 장점이라 할 수 있겠다.


 성남, 포천, 화성, 용인. 5학년, 3학년, 6학년, 1학년.

 각 선생님의 전임지와 학년이 다양해서일까. 어느 한 사람도 같은 방식으로 등교를 한 경우가 없었다. 새로운 동학년 선생님들은 지역이든, 출신 대학이든 나와는 연고도 접점도 없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의 학교 현장에서 각자도생 하며 2년을 보내온 이야기를 서로 나누다 보니, 친근한 마음이 들었다. '같은 적에 맞서서 각기 다른 곳에서 각자 애쓰고 있었구나.' 하는.


혹시 아이들이 학교에 몇 번 나왔나요?


 퇴근하는 차 안에서, 동학년 선생님들과의 대화에 나왔던 저 질문을 찬찬히 곱씹었다. 기괴했든 괴로웠든 우리는 2020년과 2021년을 지나 보냈고, 이제 2022년이다. 새 학년 새 학기를 준비하기 위해 아이들 없는 빈 교실로 출근을 하고 있다. 개학을 1주일 여 앞두었지만, 정작 아이들의 등교와 관련된 중요한 부분들은 확실히 정해진 것이 없다.


 지난 2년이 그랬듯, '아이들이 과연 학교에 몇 번 나오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이들이 월, 화, 수, 목, 금요일 모두 학교에 나오는 일'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 나는 3월의 봄날에도 2월의 지금처럼 아이들 없는 빈 교실을 맞이해야 할 수도 있다. '아이들 없는 교실'이 낯설지 않고, 당연했던 등교는 당연하지 않다. 괴리감이 드는 건, 내가 이렇게 불확실한 상황을 더 이상 어색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몇 번 학교에 나왔느냐.'는 질문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였던 것처럼.



 그것이 우리에게 오기 전으로 되돌아가다.

 

 코로나의 종식. 이것도 한낱 작은 인간의 바람일 . 어쩌면 그것은 장기적인 계획도, 거창한 목표도, 목표를 정할 마음도 없이 떠돌아다니고, 나는 다만 불안해하고  막혀하며 어찌할 바를 모른다.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것은 이미 우리 생활의 일부이기에, 코로나가 끝난다는 것이 코로나 이전으로 되돌아간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없을  같다. 그것이 오기 전의 생활, 안온하게  다져진 과거의 길은  기억 안에만 존재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원래의 모습보다 미화된다. 풀숲이 무성하여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과 여전히 마주했으니,   있는  가급적 안전한 방향을 선택하고 조심스럽게 길을 내며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과정이 냉혹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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