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캡선생 Dec 04. 2022

4차 '커피'산업혁명


몇 달 전에 커피 업계에 있는 대표님이 마케팅과 브랜딩 관련해서 조언을 구해왔다. 커피 업계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싶다는 크나큰 포부와 함께. 


미팅 내내 그분은 열정 가득한 눈빛과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고 그 공간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불꽃같은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스티브 잡스가 말한 "Make a dent in the universe(우주에 한 획 혹은 빵꾸 한 번 내보자)"의 시작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미팅 후에 주저 없이 함께 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패러다임을 정의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를 위해 본격적인 조사를 들어갈 무렵 갑작스럽게 프로젝트가 무산되었다. 대표님의 개인적인 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분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유는 밝히지 않겠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 어렴풋이 아이디어가 떠올랐기에 이것을 그냥 버리기는 아쉽기에 이 글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해보고자 한다. 물론 엄밀한 조사와 데이터에 기반한 생각이 아닌 온전히 나의 뇌피셜임을 참고 바란다.  


과학 방법론으로서 칼 포퍼는 '반증주의와 비판적 사고'를 이야기했고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을 따라가는 정상과학'을 이야기했다. 여기서 나는 토마스 쿤의 방법론을 따라가고자 한다. 왜냐하면 모든 커피 산업이 발전하는 양상을 살펴보기에는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이 더 적절한 도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용어는 쿤이 1962년에 처음 출간한 책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원래는 문법에서 나오는 용어고, 그 맥락에서는 '범례'또는 더 알아듣기 쉬운 '어형 변화표'로 번역됩니다.

쿤은 과학에서도 이런 식으로 누가 정말 멋진 연구성과를 한 가지 올리면 다들 그것을 본받아서 모방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과학적 전통이 생겨난다고 은유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쿤은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너무 느슨하게 사용해서 처음에 규범이 되는 본보기도 패러다임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쿤 자신도 인정한 실수입니다.

그렇게 하나의 전통이 확립되면 과학자들은 그것을 충실히 따라갑니다. 기초적인 논의와 논란은 다 접어두고, 세부적인 문제들을 자신들 패러다임의 특이한 사고방식으로 깊이 파고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난해하고 정밀한 전문적 지식을 쌓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과학연구 활동을 쿤은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라고 지칭했습니다.

쿤은 정상적인 과학연구의 목적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패러다임의 틀 안에서 새로운 것을 밝혀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중 -






1. 커피의 대중화 (다방과 믹스커피)


다방이라고 하면 '커피'보다는 '쌍화차'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이는 군사정권 시절 외래품 판매 금지 품목에 커피가 포함되면서 일어난 일이고 초기에 다방은 말 그대로 커피 판매가 주력인 커피 하우스였다. 1890년대 전후를 기점으로 대한민국에 외국인에 의한 호텔들이 건립되고 부속 시설로 다방이 생긴 것을 그 시초로 보고 있다. 그 후 호텔에만 있던 다방들이 밖으로 나와 독자적인 다방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다방을 통해 스멀스멀 올라오던 커피에 대한 대중들의 욕구를 폭발시킨 것은 동서식품이 만든 '커피믹스'일 것이다. 이로써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커피 산업의 기틀이 완성되었다.

사진 출처: 오마이뉴스


2. 제3의 공간 (스타벅스)


1999년은 우리나라 커피 업계에서 가장 중요한 해 중 하나일 것이다. 이화여자대학교 앞에 스타벅스 1호점이 생긴 해이기 때문이다.


스타벅스 1호점. 사진 출처: smartincome.co.kr


커피 한 잔에 3,000원이 넘는 가격은 당시에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자장면 한 그릇이 그 정도 가격이었기에 '한 끼=한잔'이라는 사실을 국민들이 쉽게 납득하기는 힘들었다. 자판기 커피는 스타벅스 커피 가격의 1/10이었고 커피믹스로도 충분히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사치를 부리는 사람' 더 심하게는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곤 했다. 특히나 스타벅스를 즐기는 여성들에게는 '된장녀'라는 비하적 용어도 붙었다. 


그리고 지금 와서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지만 스타벅스에 남자 혼자 혹은 남자들이 같이 가는 것도 이상하게 보는 시선이 있었다. 스타벅스를 꽤나 자주 갔던 나와 친구들도 이러한 시선을 받곤 했다(그럼에도 꿋꿋이 다녔다).


아무튼 스타벅스로 인해 밥 한 끼에 상응하는 가격의 커피를 매장에서 마시는 게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그와 더불어 카페라는 공간에서 '공부', '비즈니스 미팅', '소개팅' 등 다양한 일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스타벅스가 '카페 = 제3의 공간'이라는 패러다임을 만든 것이다.

스타벅스가 1971년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 첫 번째 매장을 낼 때만 해도 라테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매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남의 장소이자 수마트라 커피를 샘플링하거나 남미에서 온 원두에 대해 배우는 공간이 되었다. 1987년에 스타벅스는 에스프레소 음료를 도입하고 좌석도 마련하면서 유럽 카페 모델로 확장했다. 고객들은 특별히 만날 사람이 없어도 매장에 머물며 (모르는 사람들과의) 캐주얼한 만남 및 휴식을 즐기곤 했다. 1989년까지 이러한 현상을 부를 만한 용어가 없었다.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는 집과 직장을 제외하고 사람들이 모이고 휴식을 취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을 가리켜 '제3의 공간'이라고 명명했다.

- Heidi Peiper, "Reimagining the Third Place: How Starbucks is evolving its store experience", Starbucks Stories & News, 20220913 중 -

* 본인 번역



3. 스페셜티 커피 (블루보틀)


스타벅스가 '제3의 공간'이라는 패러다임을 만들고 나서 대부분의 카페는 '커피' 보다는 '공간'에 집중했다. 극단적인 예로는 카페베네가 있다. 커피 맛은 안중에도 없고 공간에만 집중하는 전략으로 확장을 해서 '바퀴베네'라고 불릴 정도로 전국을 카페베네 매장으로 뒤덮으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난 아직도 카페베네를 생각하면 연탄을 연상케 하는 탄맛의 커피가 떠오른다.)

사진 출처: 네이버 뉴스


이렇게 다수가 '커피'보다는 '공간'에 집중하고 있을 때도 묵묵히 커피라는 본질에 집중하고 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소수의 카페가 스타벅스가 만든 패러다임을 부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카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뉴스


블루보틀은 다른 카페들과 달리 오래 머물기는 힘든 공간을 선보인다. 대부분의 매장이 휴대폰이나 노트북 충전을 위한 콘센트도 없고 의자는 딱딱하며 와이파이도 없다. 즉 '제3의 공간'이라는 패러다임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신 그들은 '커피'라는 본질에 모든 것을 집중한다. 더 정확히는 '커피 경험'이라는 본질에.


블루보틀은 '미국 3대 스페셜티 커피'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한국에 들어왔고, 에스프레소 머신을 활용하는 다른 카페들과는 달리 전문가처럼 보이는 바리스타가 천천히 커피를 내리는 드립 커피 방식을 선보인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최고의 커피를 선보이겠다는 것을 시각적으로도 보여주는 것이다.


‘스페셜티 커피’는 커피업계 ‘제3의 물결’로 불리는 세계적인 트렌드다. 국제 스페셜티커피협회(SCA) 기준으로 100점 만점에 80점 이상 받은 원두를 ‘스페셜티’로 부른다. 하지만 진정한 스페셜티 커피는 엄격하게 관리되고 제대로 로스팅 및 추출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커피나무 상태, 커피 농장 농부, 생두에 등급을 매기는 커퍼, 생두의 맛과 향을 끌어올리는 로스터, 이를 최적의 한 잔으로 만들어내는 바리스타까지 모든 과정이 중요하다.

 - 김보라, "베일 벗은 블루보틀 1호점…스페셜티 커피 시장 달아오른다", 한국경제신문, 20190503 중 -


블루보틀의 성공 이후 많은 카페에서 다양한 원두의 커피를 선보이고 있다. 그리고 기존의 대형 카페들도 아메리카노를 주문할 때 고객이 원두를 선택할 수 있게 하는 등 '커피'라는 본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블루보틀이 '공간'에서 '커피'로 패러다임을 전환시킨 것이다.



4. 스페이스리스 커피


커피의 대중화에서 제3의 공간, 그리고 공간에서 커피라는 본질로. 그렇다면 다음 패러다임은 무엇일까? 여기부터는 상상력의 영역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네 번째 패러다임은 "언제 어디서든 최상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스페이스리스(Spaceless) 커피'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패러다임에는 '공간'이 중심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공간에 국한되지 않고 최상의 커피를 어디서든 마실 수 있는 환경이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의 커피는 멋진 공간과 함께 곁들이는 무언가라면 이제는 커피라는 것 그 자체를 온전히 즐기는 흐름이 올 것 같다. 이러한 내 생각의 단서는 몇 가지가 있다.


먼저 기존에는 자릿값이라고 생각하면서 스타벅스, 커피빈 등의 커피를 매장에서만 마시던 사람들이 기꺼이 테이크아웃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000원짜리 저가 커피는 물론이고 고가 커피도 테이크아웃을 하는 모습을 흔하게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홈카페도 빠르게 올라오고 있다. 마켓컬리의 판매량 분석에 따르면 2019년 대비 2021년 홈카페 관련 상품 매출이 6배 증가했다고 한다. 이러한 객관적 수치를 확인하지 않더라도 예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캡슐커피머신 혹은 드립백을 이용해 집에서 커피를 즐기는 사람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캠핑이나 여행을 갈 때도 고품질의 커피를 즐기기 위해 필요한 도구를 들고 가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처럼 다음 단계의 패러다임은 단순히 맛있는 커피를 카페에서만 즐기는 것이 아닌 언제 어디서나 즐길 수 있는 문화일 것 같다. 



전설적인 하키 선수 웨인 그레츠키는 "퍽(puck: 하키 경기의 공)을 따라 움직이지 말고, 퍽이 움직일 곳을 예측해서 움직이라"라는 말을 했다. 이처럼 사람들이 있는 곳에 뒤늦게 가기보다는 사람들이 가고 있는 곳 혹은 갈 곳에 미리 가 있어야 큰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소문에 살고 뉴스에 팔아라"는 주식의 격언도 이러한 맥락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떠한 산업에 있건 패러다임을 정의 및 정리하고 넥스트 패러다임을 상상해보면 어떨까? 그곳에서 여러분은 우주에 한 획을 먼저 긋고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같이 보면 좋은 글>

https://brunch.co.kr/brunchbook/kaptop8


매거진의 이전글 위대한 마케터는 무아지경에 빠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