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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선생 Aug 05. 2022

자기 계발이 위험해지는 순간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는 편이다.


꼭 자기 계발을 해야 하나요?


꼭 성장을 해야 하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쓰는 글들 그리고 더 크게는 나의 삶은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에 대한 것이 주를 이룬다.(심지어 인스타그램에서는 '자기계발시'라는 유형의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런 을 보고 모순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 또한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나의 생각과 삶을 그대로 타인에게 강요할 생각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지금 상황에 100% 만족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혹은 기대치를 계속 낮추어 삶을 만족스럽게 만드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혹은 프랑수아즈 사강이 말한 대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철학 하에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계발에 관심이 많고 또한 그것을 즐기는 입장에서도, 자기 계발이 하나의 도덕적 의무처럼 모두에게 강요되고 있는 지금의 사회에 대해서는 우려를 하는 편이다.


'자기 계발' 혹은 더 많은 사람들이 큰 이견 없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성장'은 절대적 선(善)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자기 계발은 위험해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크게 세 가지 이유에서.



1. 절대적 선은 절대적 악을 만들어낸다.


자기 계발이 절대적 선이 되는 순간 이 흐름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적 악(惡)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어진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논쟁하지 않을 것이고, 진귀한 물건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훔치지 않을 것이며, 무엇이 바람직한지 보여주지 않으면 사람들의 마음은 불안해지지 않을 것이다

- 노자 -


이처럼 무언가를 '좋은 것'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와 반대되는 것은 '나쁜 것'이 되어버린다. 자기 계발이 개인의 선택이 아닌 의무가 되어버리면 우리는 의도치 않게 수많은 악당들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뚱뚱한 사람', '학벌이 좋지 않은 사람' 등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가치판단과 비하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들이 자기 계발(혹은 더 직접적으로'노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2. 경험의 세계를 좁힌다


내가 대학 신입생일 때만 해도 동아리는 취향에 따라 선택하는 영역이었다. 즉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직접적 도움이 되느냐가 아닌 나의 마음에 얼마나 드느냐에 따라 동아리를 가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졸업할 무렵 이러한 경향은 180도 바뀌었다. 동아리가 얼마나 자기 계발(더 정확히는 취업을 위한 자기 계발)에 도움이 되느냐에 따라 학생들에게 간택을 받게 된 것이다.


대학 졸업 후에도 이러한 경향성은 지속된다. 자기 계발에 도움이 되지 않아 보이는 행위들은 배척되기 십상이다. 내가 여가시간에 철학과 물리학을 공부할 때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 "그게 어디에 도움이 돼?" "시간 낭비 아니야?" 등이었다. 자기 계발과는 거리가 먼 영역이라고 여겨져서일 테다.


그러나 자기 계발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면 오히려 더 나은 자기 계발을 하지 못하게 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즉 경험의 폭이 좁아져 사고의 깊이는 얕아지고 넓이는 좁아진다. 더 나아가 창의성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적당한 시간적 여유와 자기 계발과는 무관한 활동을 할 때 창의성이 쉽게 발휘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랑티에'다.


랑티에(Rentier)란 '(주로 국채로 사는) 금리 생활자'다.

유럽에서는 선조 가운데 누군가가 약간의 재산을 모아 그것으로 아파트와 국채를 사서 유산으로 남겼다면, 상속인은 (분에 넘치는 짓만 하지 않으면) 평생 무위도식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유럽의 집은 석조라서 사람들은 거기서 선조 대대로 물려받은 가구와 집기를 그대로 쓰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유럽은 데카르트의 시대부터 1914년까지 화폐 가치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랑티에는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거나 극장과 살롱을 방문하거나 철학과 예술을 논하거나 살인사건의 범인을 추리하며 일생을 마친다. 물론 결혼 따윈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랑티에들이야말로 유럽 근대문화의 창조자이자 비평자이며 향수자였다.

부르주아지는 돈벌이에 여념이 없고, 노동자들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생활과 혁명 준비 때문에 그런 '놀이'에 어울릴 여유가 없다. 결국 근대 유럽에서 최고의 '모험'적 시도와 '문화'적 창조를 담당한 것은 바로 랑티에들이었다.

- 우치다 다쓰루의 <거리의 현대사상> 중 -


3. 모든 게 개인의 탓이 되어버린다.

 

자기 계발의 근간에는 다음과 같은 믿음이 있다. "나는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하고 노력한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얼핏 보았을 때는 굉장히 멋지게 보인다. 다만 외부적 변수를 고려하지 않고 무한한 책임을 개인한테만 지운다는 점에서는 굉장히 위험한 믿음이 될 수도 있다. <건강 신드롬>이라는 책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웰니스 신드롬(Wellness Syndrome)은 '모든 개인은 자율적이고 유능하고 의지가 강하고 끊임없이 자기 계발에 힘쓰는 존재'라는 규정을 전제로 한다. 개인이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선택할 수 있다고 단정하는 것이야말로 죄책감과 불안감을 촉발한다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우리는 아무리 주변 환경이 불리하게 돌아가도 자기 인생은 자기가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주입받는다. 이는 경기불황 속에서 구직활동을 하는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이들은 경제위기를 탓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주문, 취직은 결국 개인의 의지와 선택의 문제라는 조언을 들어야 한다.

이런 현실에서 실업자는 복지수당이 아니라 라이프 코칭을 받는다. 차별받는 집단은 자신의 정체성을 자랑스러워할 기회가 아닌 운동 계획표를 받는다. 시민들은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는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기회가 아니라 마음챙김 수업을 받는다. 그 과정에서 불평등과 차별, 권위주의는 정면으로 대응하기엔 너무 거창한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정치인의 야심도 너무 거창한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정치인의 야심도 근시안적으로 전락해 유권자의 웰빙 증진에만 골몰하게 된다.

- 칼 세데르스트룀, 앙드레 스파이서의 <건강 신드롬> 중 -

대(大) 자기 계발 시대에 이러한 나의 말이 크게 와닿지 않을 수 있다. 심지어 자기 계발형 인간으로 보이는 사람이 이러한 말을 하니 설득력이 더 떨어질 것 같기도 하다. 다만 내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단 한 가지이 말에 대한 판단은 온전히 여러분에게 맡기자 한다.


자기 계발은 선택이 아닌 의무가 되는 순간 위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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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Edwin Hoop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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