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갈 때마다 방문하는 단골 술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렇게 말하면 술꾼 같지만 술린이에 가깝다)
협재에 위치한 술집 '에디손'. 사진 출처: 인스타그램 @edi__son_
협재에 위치한 이 술집은 혼자 가서 술을 마시다 보면 옆에 있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와 구조다. 사장님이 주문받고 요리하는 주방을 마주하는 바테이블이 특히나 그렇다. 나는 주로 바테이블에 앉아서 술을 마시는데 사람이 없으면 책을 읽거나 사장님과 대화를 하고 다른 손님이 있으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그날도 바테이블에 앉아서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옆에 앉아있던 부부가 우리의 대화에 자연스레 참여했다. 몇 마디 나누다 보니 나 포함 세 명이 모두 대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대표참 힘들다"라는 공통의 감정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가장 공감한 것은 직원(혹은 후배) 눈치가 너무 보인다는 것이었다.
사회초년생일 때만 해도 팀장님이 내 눈치를 본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 눈치를 보는 것은 부하직원의 몫이지 팀장급이 팀원에게 가질 수 있는 감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느끼게 되었다. 팀장도 그리고 대표도 부하직원 눈치를 본다는 것을. 그것도 아주 많이.
시대가 많이 변하긴 했지만 여전히 후배가 선배의 눈치를 보는 것은 일반적이고 또한 많은 경우 그것을 미덕으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기에 선배 눈치를 보는 것을 굳이 숨기려는 직원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선배는 후배 앞에서 항상 당당하고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서인지 후배눈치를 본다는 것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선배는 본인이 후배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최선을 다해 숨기려 한다. 즉 사회적 인식이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을 강화하고 강화된 현실은 다시 이러한 사회적 인식을 공고히 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표는 이렇게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다른 대표들에게나 본인의 고충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왜 그렇게 수많은 CEO 조찬모임이 있겠는가? 새로운 트렌드를 배우기 위해서? 인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물론 이러한 이유도 있겠지만 자신의 고충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 대상과 장소를 이러한 모임이 제공하는 것도 큰 이유일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CEO 모임은 집단 심리상담소일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고통은 내부에 있는 아픔을 외부로 거칠게 끄집어내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자주 분노하는 대표는 안하무인이라기보다는 후배 눈치를 너무 많이 본 나머지 신경과민이 온 환자일지도 모른다.
언제는 안 그랬냐마는 오늘의 글은 상당히 개인적이고 그래서 매우 편향적일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대표가 나름대로 힘드니 이해해달라는 목적으로 쓴 것은 아니다. 다만 사회적 인식이 대표를 비롯한 모든 선배에게 늘 당당하고 눈치 보지 말아야 한다는 중압감을 줘서 발생하는 선후배 관계의 왜곡을 다 한번 생각해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써봤다.
선배와 후배는 각자의 이유로 서로의 눈치를 많이 보는, 좋게 말하면 서로를 생각보다 많이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