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세계관은 근대의 개념이다. 큰 이야기를 기반으로 작은 이야기를 수없이 창출하는 근대의 이야기인 것이다. 국민가요, 국민드라마, 국민영화와 같은 큰 이야기가 사라져 가고 있는 시점에서 이러한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는 2차 창작은 그 수명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 이제는 세계관이 아닌 데이터베이스관을 만들어야 한다.
대표적으로 세계관을 근간으로 펼쳐나가는 애니메이션으로 <건담>이 있고, 그와는 다르게 데이터베이스관으로 이야기를 펼친 애니메이션으로 <에반겔리온>이 있다.
세계관을 근간으로 하는 유니버스와는 다르게, 데이터베이스관을 근간으로 하게 되면 관찰자의 시점과 욕망에 따라 멀티버스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건담> 팬들은 건담의 세계를 정밀 조사하는 데 욕망을 쏟고 있다. 즉 거기에는 가공의 커다란 이야기에 대한 정열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에 나타난 <에반겔리온>의 팬들, 특히 젊은 세대는 그 붐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조차 에반겔리온의 세계 전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지 않았단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들은 처음부터 2차 창작적인 과도한 읽어내기나 캐릭터 모에의 대상으로서 캐릭터의 디자인이나 설정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작품에서 가이낙스가 제공한 것은 TV 시리즈를 입구로 한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시청자 누구나 마음대로 감정 이입하고 저마다 나름의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는 이야기 없는 정보의 집합체였던 셈이다.
<에반겔리온>의 소비자 대부분은 완성된 애니메이션을 작품으로 감상하는 (종래의 소비) 것도, <건담>처럼 그 배후에 감춰진 세계관을 소비하는(이야기 소비) 것도 아니라 처음부터 정보=비이야기만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은미 옮김, 문학동네, 2012)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