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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선생 Aug 30. 2022

AI가 시를 쓰는 시대에 더욱 중요해질 '이것'


어느 날 지인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과 글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바로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 낸 '시집'에 관한 내용이었다.


사진 출처: 카카오 브레인


'시아'는 카카오브레인의 초거대 AI 언어 모델 KoGPT를 기반으로 시를 쓰는 AI 모델로, 1만 3천여 편의 시를 읽으며 작법을 익혔다. 주제어와 명령어를 입력하면 '시아'가 입력된 정보의 맥락을 이해하고 곧바로 시를 짓는다.

AI 기술을 활용한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창작을 위해 기획된 시집 '시를 쓰는 이유'는 총 53편의 시로 구성돼 있다. '시아'의 언어인 디지털 연산을 위한 기계어 0, 1을 활용하여 1부의 주제는 공(0), 2부의 주제는 일(1)로 선정했다. '영' 대신 '공'으로 표기한 것은 존재와 비존재, 의미와 무의미의 관계를 함께 담고자 하는 카카오브레인과 슬릿스코프의 의도가 담겨있다.

- 장가람, "카카오브레인, 시쓰는 AI '시아' 시집 출간", 아이뉴스, 20220801 중 -


AI가 인간의 창의성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은 사실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이미 AI는 그림, 음악, 심지어 요리 레시피까지 다양한 창의성의 영역에서 맹활약(?) 중에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인의 포스팅에 관심이 간 이유는 해당 뉴스에 대한 지인의 의견이 내가 늘 생각하고 있던 관점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글만 가지고는 AI와 경쟁하기 어렵게 될 테니, 인간 작가가 가질 수 있는 차별점은 작가 그 자체가 될 것 같습니다. 작가의 삶 자체에 어떤 영감과 스토리가 있어야 글과 연결해 팔 수 있지 않을까요.

- 이요한 (인스타그램: @monk_john82) -



나는 인간이 AI와 글만 가지고 경쟁하기 어렵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글을 포함한 다양한 창작활동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의외성'이고 이러한 의외성은 인간의 뜻하지 않는 '실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AI도 이러한 인간의 실수를 모방할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인간이 만들어내는 '와비사비(わび・さび: 불완전하고 비영속적이며 미완성된 것들의 아름다움)'한 면의 경쟁력은 AI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고 본다.


다만 지인의 의견처럼 인간 작가만이 갖고 있는 결정적인 차별점은 작가의 '삶'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AI가 창작활동을 하기 전부터 특정 장르에 있어서는 '작품의 내용'보다 그것을 쓴 '작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 장르는 바로 에세이다. 하나의 문장을 예로 들어 보겠다.


나는 매일 아침 8시에 일어나 로버트 글래스퍼의 음악을 들으며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위의 문장을 무명 필자인 내가 썼다고 생각하고 읽을 때와 버락 오바마와 같은 유명인 혹은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은 유명 작가가 썼다고 생각하고 읽을 때 아마 전혀 다른 느낌으로 여러분에게 다가가지 않을까 싶다. 이처럼 에세이는 '무엇'보다 '누가'가 더 중요한 장르라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에세이는 데이트와 닮아 있다. 데이트의 만족도는 '무엇'을 하느냐 보다는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더 크게 좌지우지하니 말이다.


그런데 AI가 시를 포함한 모든 장르에 침투하고 있는 시대에는 이러한 '누가'의 중요성은 단순히 에세이에만 머물지는 않을 것 같다. 같은 내용이라도 그것을 AI가 썼는지 사람이 썼는지에 따라 독자가 받아들이는 감동과 공감의 크기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으로 널리 알려진 한나 아렌트의 말도 참고해볼 법하다.


아렌트는 활동의 경우 행위자의 고유명성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보았다. 실제로 정치인의 연설에서는 '무슨 말을 하는가' 즉 내용보다는 오히려 '누가 그 연설을 하고 있는가' 즉 '얼굴'이 더 중요하다. 다른 한편 노동의 경우에는 얼굴이나 이름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 공장 노동자나 아르바이트 점원은 익명의 숫자에 불과하다. (...) 아렌트의 말을 빌리면 노동이란 얼굴 없는 '생명력'을 매매하는 것일 뿐이다.

- 아즈마 히로키의 <관광객의 철학> 중 -


우리가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먹을 때와 유명 셰프의 음식점에서 만든 수제 버거를 먹을 때의 결정적 차이는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면 '고유명성' 유무에 있다.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을 때는 '누가 만들었는지'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와 다르게 비싼 돈과 시간을 내서 유명 셰프의 음식점에 가는 이유는 결정적으로 '누가 만들었는지' 즉 고유명성 때문이다.


AI가 창작의 영역에서 영향력을 크게 발휘할수록, 그리고 더 훌륭한 내용의 작품을 만들수록  더 중요해지는 것은 이처럼 '누가 만들었느냐' 즉 고유명성이다. 이와 비슷한 현상을 우리는 이미 경험했었다. 바로 패션에서 말이다.


사진 출처: 온앤온


학창 시절에 'Hand Made'라고 적힌 라벨이 붙은 코트는 일종의 부의 상징이었다. 그 당시에도 기계로 만든 일반 코트나 핸드메이드 코트나 큰 차이는 없었다. 그 정도로 기계로 만든 옷들도 품질이 훌륭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핸드메이드 코트(더 정확히는 해당 라벨이 붙은 코트)가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품질이 비슷할 때는 결국 '누가 만들었는지'와 같은 인식의 경쟁으로 가기 때문이다.


기계가 제조의 영역에서 맹활약을 할 때 'Hand Made'가 각광받았던 것처럼 AI가 창작의 영역에서 맹활약하는 시대에는 'Brain-Made'가 각광을 받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AI시대에 더중요해지는 것은 결국 '누구'라는 인식일 것 같다.


어쩌면 우리는 What의 시대를 지나 Who의 시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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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runch.co.kr/brunchbook/kap11


Photo by Andrea De Santi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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