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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선생 Oct 22. 2022

혜자스러운 해자

해자(Moat)


해자라는 개념이 있다.


원래 '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변을 파내어 물로 채운 곳'을 의미한다. 아래 사진처럼 말이다.


사진 출처: Photo by Jack B on Unsplash


현대인은 더 이상 성을 짓고 살지도 않고 설령 성에 산다고 해도 성 주위를 물로 채운다고 적의 침입 방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해자'는 역사책에서나 등장하는 단어가 되었다. 그래서 '해자'라는 단어를 모르는 분도 그리고 '혜자스럽다'라고 할 때의 '혜자'로 이해한 분도 있을 것이다(의미만 보면 해자와 혜자는 닮아 있다).


만약 오늘날 누군가가 '해자'라는 단어를 쓴다면 매우 높은 확률로 원래의 의미보다는 비유적인 의미로 활용하는 것일 거다. 바로 '경제적 해자'라는 의미로.


경제적 해자

경쟁사로부터 기업을 보호해 주는 높은 진입장벽과 확고한 구조적 경쟁 우위를 말한다. 해자(垓子, moat)는 원래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곽을 따라 파놓은 못을 가리키는데, 경쟁사가 쉽게 넘볼 수 없는 진입장벽을 해자에 비유한 용어가 바로 경제적 해자이다.

워렌 버핏이 1980년대 발표한 버크셔 해서웨이 연례보고서에서 최초로 주창한 투자 아이디어로 기업의 장기적 성장가치의 척도가 된다.

경제적 해자의 판단 기준으로는 무형자산, 네트워크 효과, 교체ㆍ전환비용, 비용절감의 우위, 규모의 경제, 신규 진입 요인이 제한된 시장의 선점 등이 있다. 이 중

- [네이버 지식백과]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중 -


경제적 해자를 확보한 기업과 사람은 오랜 기간 안정적인 수입(혹은 그와 동등한 무언가)을 얻을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전문직을 선호하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전문직은 정부가 부여한 자격증이라는 경제적 해자에 둘러싸여 있기에 안정적이면서도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경제적 해자는 참으로 혜자스럽다고 할 수 있다.


가격대비 음식이 훌륭해 '혜자스럽다'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김혜자 도시락. 사진 출처: GS 리테일


경제적 해자를 만드는 요소 다양한데 그중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 관점에 따라 누구나 가질 수 있으면서 누구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심리적 장벽이다. 대표적인 예로 '작가'가 있다.


종이가 귀한 시절에는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없었다. 종이를 살만한 재력이 되거나 혹은 종이를 제공받을 만큼 뛰어난 글솜씨와 영향력이 있는 소수만이 작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르다. 기술의 발전과 다양한 출판 방식이 등장하면서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다. 출판사가 책을 내주지 않으면 자가출판을 하면 되고, 자가출판경제적으로 부담된다면 전자책으로 출간해도 된다. 그야말로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문맹률(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사람의 비율)이 매우 낮은 나라는 더더욱.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책을 출간한 '작가'는 흔치 않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책을 내보라는 권유에 "내가 어떻게 책을 내?" 혹은 "작가는 아무나 하나?"와 같은 말을 하며 스스로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다. 즉 '작가'라는 존재는 심리적 장벽이라는 해자에 둘러싸여 아직도 경제적 해자의 이득을 톡톡히 누리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 심리적 장벽만 넘어서면 누구라도 경제적 해자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작가가 된다고 누구나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유명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경제적 해자로 둘러싸인 작가라는 존재는 그리고 출간한 책이 있다는 사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후광효과(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이 전반적인 인상에 영향을 주는 현상)를 부여한다. 그래서 책은 최고의 명함이다. 하나의 책을 출간하는 과정에서 얻는 직간접적인 이득은 차치하고서라도 책을 출간한 작가라는 것은 큰 이득을 가져온다.


이런 주장에 대해 누군가는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같은 사람 때문에 개나 소나 작가가 된다고 말이다. 100% 반박하기는 어려운 말이다. 나 또한 가끔 그렇게 느끼는 책을 볼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리적 장벽이 낮아짐에 따라 숨겨진 보석 같은 작가가 세상에 나올 수만 있다면 개나 소나 쓸 수 있는 책을 감내할 용의가 있다.


그리고 누가 훌륭한 작가와 쓰레기 같은 작가를 구분는 절대적 기준선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나에게 쓰레기 같은 글이 누군가에게는 인생 글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실제로 이런 경험이 있었다). 심지어 세계적인 소설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도 등단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일본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하루키의 소설에 대해 '구조밖에 없는 이야기'라고 칭할 정도였다.


내가 매일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이유는 물론 나를 위함이 크지만 부가적으로는 이러한 '경제적 해자'를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함도 있다. 더 많은 사람이 혜자스러운 해자를 누리고 그 과정에서 더 나은 작가가 탄생할 수 있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 이로운 흔적을 남기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자격이 있어서 글을 쓰는게 아니라 글을 쓰기 때문에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P.S. 물론 모두가 작가가 된다면 경제적 해자는 사라질 것이다.



<같이 보면 좋은 글>

https://brunch.co.kr/brunchbook/kap11


Photo by Victor Rodriguez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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