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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선생 Nov 15. 2022

문화가 '사물'이 아닌 '상황'이 될 때


단 하나의 예술작품만 가질 수 있다면?


나는 이 질문에 주저 없이 <반가사유상>이라고 답해왔다. 아무런 지식 없이 보았을 때고 끌렸고, 알면 알수록 더 끌리는 걸 보면 나에게는 이성과 감성을 모두 만족시켜주는 몇 안 되는 예술작품 같다.


예술에 조예가 깊지 않아서 그런지 나는 <반가사유상>을 보면 즉각적으로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을 떠올리곤 한다.


둘 다 '사유하는 존재'를 표현했지만 다소 차이가 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누가 보더라도 심각한 고민을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 고민의 깊이와 강렬함이 관람자에게 즉각적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반가사유상'은 언뜻 보았을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들다. 즐거운 상상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점심에 무엇을 먹을지를 떠올리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빠진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모나리자의 미소 같은 오묘한 느낌을 풍기는 것이다.


좌)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우)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 / 사진 출처



그런데 <반가사유상>이라는 이름을 곱씹어보면 조금 다르게 보인다. '반가'는 양다리를 좌우로 교차시키는 '가부좌'를 반만 한다는 뜻의 '반가부좌'를 의미한다. <반가사유상>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에 올려놓고 내려가지 않게 손으로 막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여기서 오른쪽 다리는 '행위'를 왼쪽 다리는 '지성'을 의미한다. 이것을 종합해서 생각해보면 '반가사유상'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만큼이나 치열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당장 행동하고자 하는 끓어오르는 충동을 끊임없이 억누르며 사유에 집중하는 모습을.


앉은 자세는 결가부좌와 반가부좌가 있다. 왼발은 지성을 의미하고, 오른발은 행위를 의미한다. 반가사유상은 오른발을 왼쪽 무릎에 올려놓은 반가좌로 되어있다. 오른발을 올려놓았다는 것은 오른발을 압박한다는 의미다. 반가사유상에서 행위(실천)보다는 지성(이론)을 강화한다는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사유상(思唯像)이라는 이름에 맞는 자세다.

- 조용헌의 <동양학을 읽는 아침>(알에이치코리아, 2017) 중 -


이와 같은 나의 <반가사유상>에 대한 관심과 애착을 신기하게 보던 사람이 예전에는 많았는데, 요새 들어서는 전혀 다른 반응이 나오곤 한다.


BTS의 RM이 좋아한다는 그거요?


RM의 작업실 좌측에 보이는 반가사유상 굿즈. 사진 출처: 인스타그램 @rkive



BTS의 RM이 구매한 반가사유상 굿즈가 인스타그램에 노출되면서 <반가사유상>은 (아마도) 단군 이래 가장 많은 관심을 얻고 있는 듯 싶다. 내가 RM 보다 먼저 좋아했다고 주장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어서, 누가 RM 따라 하기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말하려고 한다. 어떠한 대답을 하든 반가사유상을 좋아한다는 것이 '나만 아는 인디 아티스트를 좋아하는 느낌'에서 '모두가 좋아하는 스타를 좋아하는 느낌'으로 변했으니 말이다. (이럴 때면 홍대병 환자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어찌 되었건 간에 RM의 소식을 듣고 생각난 김에 반가사유상을 보러 오랜만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 대학생 때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앞뒤 지 않고 <모나리자>를 보러 돌진했듯 그 어떤 작품에도 눈길을 주지 않고 <반가사유상>이 전시된 '사유의 방'을 향해 지체 없이 나아갔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에 전시된 반가사유상 두 점(국보 78호와 83호). 사진 출처: 본인


<반가사유상> 두 점이 전시된 사유의 방은 흡사 소극장과 같은 느낌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작품을 경험하라는 듯 방에 들어서면 작품은 보이지 않고 그 대신 벽과 기다란 복도가 나타난다. 복도 옆면에 ASMR을 연상케 하는 영상과 소리를 접하면서 작품이 있는 곳으로 걷다 보면 관람객도 조금씩 사유하는 존재가 되어간다. 관람객이 사유하는 존재가 될 즈음 <반가사유상>은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 나와 같이 사유할 준비가 되었냐고 질문을 하듯 고요하게 중앙에 자리 잡은 모습을 말이다.


기존에 <반가사유상>을 보여주는 방식이 '관람'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사유의 방은 그것을 '경험'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듯했다. 작품을 360도로 관람할 수 있게 함은 물론이고 공간 자체를 사유할 수 있게 조도나 구조 그리고 색감까지 고려한 듯 보였다. 발터 벤야민의 "후손에게 사물을 물려주지 말고 상황을 물려주라"는 말에 부합하는 공간이었다.


파괴적 성격(The Destructive Character)>에서 벤야민이 말하기를, "후손에게 사물을 물려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사물을 물려주는 방법은 못 만지게 해서 보존하는 것이다. 한편, 후손에게 상황을 물려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상황을 물려주는 방법은 실용되게 해서 청산하는 것이다." 전통이 물려주는 것은 '기념비' 따위의 '사물'이 아니라 '상황'이요, 작품 하나하나가 아니라 작품들을 구축하고 동원하는 전략이다. 우리가 전통을 지속적으로 재평가한다기보다는, 과거를 발굴, 수호, 공략, 폐기, 재등록하는 계속된 실천이 바로 전통이다.

- 테리 이글턴의 <발터 벤야민 또는 혁명적 비평을 위하여>(김정아 옮김, 이앤비플러스, 2012) 중 -


K콘텐츠는 어느덧 세계적인 콘텐츠가 되었다. 한류라는 이름으로 아시아 전역을 강타한 것을 넘어 <오징어 게임>의 성공과 BTS의 빌보드 1위 등으로 이제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을 때 과연 우리는 우리의 문화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는 어떻게 이 문화를 전할지도.


정답이 무엇일지는 모르겠지만 발터 벤야민이 말했고 사유의 방이 보여주었듯이 이제 우리는 문화를 단순히 관람하는 '사물'이 아닌 온몸으로 체험하는 '상황'으로 대하고 다음 세대에게도 그렇게 전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유의 방에서작품과 관람객 모두 사유하는 존재가 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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