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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선생 Dec 20. 2022

불행이 연료인 사람

※ 인물을 특정하지 않기 위해 다소 각색하였습니다.


몇 년 전에 세상에서 가장 불운하면서 정의로워 보이는 사람을 만났다.


그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악인(惡人)이 득실댔으나 그는 어디에서든 정의로운 행동을 하려고 노력했다. 회사도 마찬가지여서 상사의 폭언과 갑질에 시달리다 퇴사 후에 새롭게 입사한 회사에는 또 다른 부조리로 가득했다. 고객을 기만하고 불량품을 못 본 체하는 등 사회악이 만연한 회사였다. 정의로운 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개선하려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다시금 퇴사를 하게 되었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고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를 만날 때면 이러한 사실의 볼륨이 고막이 터질 듯 커지는 느낌이었다. 그가 나에게 힘든 것이 없냐고 물을 때면 할 말이 없었다. 나의 세상은 꽤나 감사한 일들이 많았고 그의 세상에 비하면 천국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위로와 공감 그리고 때때로 밥을 사주고 그가 좋아하는 영화표를 선물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물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나와 연관 있는 단체를 사회악에 빗대어 악평을 해놓은 것이었다. 순간 믿기지가 않아 댓글을 달았다. 어떠한 연유에서 이러한 글을 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도 큰 오해이고 성급한 의견인 것 같다고. 그러자 그는 '나'는 괜찮은 사람이지만 '그 단체'는 본인이 짧게 경험해본 바 나쁜 단체가 맞다고 그러니 양해해달라고 대댓글을 달았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운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반전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그동안 이상하게 생각했던 일의 모든 퍼즐이 질서 정연하게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일했던 지인이 그 사람을 조심하라고 말했던 것. 어떠한 단체이건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퇴사했던 그의 행적. 그리고 다양한 사람과의 불화. 흐릿했던 모든 것이 뚜렷해졌다. 내가 그의 총구 앞에 서보니 말이다.


뱀파이어에게 피가 필요하듯 그에게는 불행이 필요했다. 정확하게는 '불행으로 보이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그것에 맞서고 이겨내는 정의로운 사람으로 보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조선시대 선비가 따뜻한 방에서 소고기를 맛있게 먹으면서, 손에 피를 묻혀가며 그 소를 잡은 백정을 욕하듯 말이다.


그는 본인의 불행뿐만 아니라 타인의 불행도 필요로 했다. 내가 감사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귀 기울여 듣지 않다가도 안 좋은 일 혹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면 엄청난 집중력을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주변에는 불행 혹은 불운한 사람이 가득했다. 그는 힘들 때 함께해주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힘들 때'만' 함께해주는 사람이었다. 이 둘을 구별하기란 꽤나 어렵지만.


본인의 삶에는 '그럴싸한 불행' 그리고 타인의 삶에는 '진짜 불행'이 있어야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그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는 불행을 연료로 하다 보니 연료 본인을 구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글을 쓰기 전에도 몇 번이나 그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지만, 그는 변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내 안에 쌓아둔 이야기를 이렇게나마 풀어본다. 아마도 그를 제외한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모를 것이다.


타인을 까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지만 오늘 글은 의도야 어쨌든 그런 식으로 흐르게 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는 게 있다면 만약 그가 이 글을 본다면 한 번만 자신의 삶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으면 한다. 불행이라는 연료로 살아가는 것이 맞는지. 다른 연료로 살아가는 삶은 어떠할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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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Marius Matuschzik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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