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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도플갱어를 만난다면

by 캡선생

자신과 똑 닮은 타인으로 일컬어지는 도플갱어를 만나면 죽는다는 속설이 있는데, 나는 올해 도플갱어를 만났고 아직까지 죽지 않았다. 그 도플갱어의 이름은 '야마구치 슈'이다.


작년에 '나의 올해의 책 어워즈'라는 모임을 통해 다양한 작가와 책을 추천받았는데, 그중에 가장 인상적인 작가가 야마구치 슈였다. 그래서 올해 초부터 연달아 그의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는데 특정 책에서 움찔할 정도로 놀랐다. 그의 책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에서 마치 내가 쓴 글을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책에서 나를 보는 듯했다.


물론 내가 그와 동일한 수준의 글을 쓴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다만 내가 해당 주제를 썼더라면 펼쳤을 논리구조와 근거로 들었을 철학가와 사상가를 그가 그대로 써 내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느꼈다. 심지어 몇몇 글은 내가 작년에 브런치에 쓴 글과 매우 유사해 보였다. 야마구치 슈가 나 같은 무명인의 글을 참고했을 리도 없고 출간일을 기준으로 봐도 내가 늦기 때문에 누가 봐도 영향을 받은 쪽은 나라고 보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쓴 시점은 작년이고 그의 책을 읽은 것은 올해 초이니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그러면 정말 그는 나의 도플갱어인가?


몇 가지를 고려해 보니 이는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게 되었다. 그와 나는 사고의 '인풋'과 '프로세스'면에서 매우 유사했기에 글이라는 '아웃풋'도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쉽게 말해 비슷한 재료를 비슷한 레시피로 만들었으니 음식이 비슷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요리사의 수준은 차이가 나겠지만.


그의 글을 관통하는 키워드 하나만 꼽자면 '철학'일 것이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처럼 제목부터 철학을 내세우는 책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책은 '철학'이라는 근간 위에 세워진 건물과도 같았다.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는 대부분의 내용은 철학자의 이론이었고, 사고의 출발점도 철학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 또한 그처럼 철학에 근거해서 글을 쓰는 편이고, 생각의 단초 또한 철학에서 얻는 경우가 많다. 내 글을 꾸준히 읽는 분이라면 공감하리라 본다.


철학이라는 큰 테두리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떠한 철학가와 사상가를 참고하는지를 보았을 때도 그와 나는 교집합이 많았다. 쉽게 말해 그와 내가 공유하는 작가와 책이 많았다. 나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상가인 우치다 다쓰루는 그도 많이 언급하는 작가였고, 아즈마 히로키를 비롯한 그가 언급하는 다수의 사상가는 내가 즐겨 읽는 책의 작가들이었다. 이처럼 그와 나는 매우 유사한 인풋을 공유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고의 프로세스 또한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일본의 유명 광고기업인 '덴쓰'와 세계적인 컨설팅 기업인 '보스턴컨설팅그룹'에서 일을 했는데 나도 그와 비슷하게 '마케팅'과 '컨설팅'을 오랜 기간 해왔다. 즉 그와 나는 모두 마케터이자 컨설턴트의 사고방식을 장착하고 있는 것이다. 특정한 업무를 지속적으로 하다 보면 그 업무에 최적화된 사고를 하기 마련이다. IT 개발자는 IT 개발자스럽게, 영업인은 영업인스럽게 그리고 마케터는 마케터스럽게 사고를 하는 것이다. 같은 인풋이 주어져도 본인이 속한 업종에 최적화된 프로세스를 거쳐 아웃풋을 뽑아내기 마련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와 나는 비슷한 사고의 프로세스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진리의 사바사(사람 바이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야마구치 슈의 책과 당신의 브런치 글을 모두 읽어 보았지만 공통점을 못 느끼겠는데?'라고 생각하는 분도 분명히 있으리라 본다. 다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웃풋의 수준차이에서 발생하는 다름일 것이다. 너구리 라면을 똑같이 끓여도 맛이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날 수 있듯이 말이다.


아직 나의 글쓰기는 갈길이 멀다. 이미 대중에게 지지를 받는 다수의 책을 낸 야마구치 슈에 나를 비하는 것은 무리수에 가까울 것이다. 다만 나와 비슷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선배를 만났다는 사실은 지금 괜찮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안도감과 함께 앞으로 이것을 넘어서야만 한다는 도전의식을 동시에 선사받는 느낌이다.


마라도나가 있었기에 메시가 있을 수 있었듯이, 나 또한 멋진 글쓰기 선배들을 보며 더 큰 꿈을 꾸어보고자 한다. 꿈꾸는데 어떠한 자격도 한계도 필요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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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UnsplashVince Fle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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