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쓴 <고객은 '종횡무진'이다>에 달린 댓글 '덕분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덕분에'를 강조한 것은 비꼼이 아닌 진심이다. 이 글은 절대로 저격도 반론도 아닌 댓글이 재밌는 글감을 제공하여 쓸 수 있게 된 후속작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시작하고자 한다.
댓글을 단 분은 완곡하게 썼지만 내용을 요약하면 '용두사미 같은 글이어서 아쉽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 같아도 그렇게 느낄 수 있었겠다 싶었다. 내가 브런치를 대하는 태도를 고려했을 때 이런 반응은 애진작에 나왔어야 마땅한데 지금에서야 이런 댓글이 달린 것도 이상한 일이다.
일단 내가 브런치를 대하는 태도를 간략히 말하자면 아래와 같다.
1) 완성된 글이 아닌 추후에 완성할 것을 염두에 둔 밑재료 수준으로 맘 편히 쓴다. 물론 날이 갈수록 밑재료 수준의 기준치는 조금씩 높여나가고 있다.
2) 핸드폰으로 읽는 사람에게도 부담이 없도록 짧은 분량으로 쓰고자 노력한다.
3)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자 한다. 우치다 다쓰루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독(誤讀)할 자유'를 독자에게 주고자 한다.
이러한 태도로 글을 쓰다 보니 누군가에게는 쓰다만 것 같고, 두리뭉실하게 느껴질 가능성이 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한 지적이 나오더라도 '반론'이나 '해명'의 성격으로 인터넷상에서 글을 쓰는 것은 시간과 노력대비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나, 이번에는 앞서 말한 대로 하나의 좋은 글감을 받은 기분이라 댓글에서 지적한 부분을 토대로 글을 이어 나가볼까 한다.
*따옴표로 표시한 부분이댓글 내용이다.
고객유형을 구분 짓는 것은 판매자 or 생산자(사업자)의 관점일 뿐 고객 이기 이전에 결국 인간이라는 본질만 놓고 보아도 다양할 수밖에 없음을 우린 대부분 알고 있다고 봅니다.
맞는 말이다. 인간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를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객 관점을 염두에 둔)사업자의 관점에서 고객을 구분 짓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류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어떤 존재이든 분류는 카오스보다 낫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고객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분류가 없는 고객은 사업자의 눈에 카오스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떻게 분류하느냐에 따라 고객을 대하는 태도와 전략은 크게 달라진다. 예전에는 온라인에서 고객을 타겟팅 할 때 주로 나이와 성별등으로 분류하는 인구통계학적인 모델(Demographics)을 기반으로 했다. 그러다 보니 같은 나이와 성별에 존재하는 수많은 다양성을 놓치는 우를 범할 수밖에 없었다. 관심사 등으로 분류하는 심리통계학적 모델(Psychographics)을 기반으로 하는 타겟팅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지면서 기존에 놓쳤던 혹은 오해했던 타겟을 조금이나마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내가 고객을 '종횡'으로 나눈 것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 조그마한 기대에서 글을 써보았다.
그걸 한 차원 뛰어넘는, 인간 본성을 꿰뚫을 수 있는 브랜딩, 혹은 마케터의 관점이 궁금했었는데 조금 아쉬운 글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인간 본성을 꿰뚫어 보는 관점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할 수준이 못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기대하셨다면 스미마셍("죄송하다"는 너무 엄숙한 표현일 것 같고 스미마셍의 뉘앙스가 더 적절할 것 같다).
일단 인간 본성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불교에서 말하듯 '모든 것은 상호 연결되어 있는 인과관계'라는 연기법(緣起法)을 기반으로 바라봐야 할까? 아니면 <우파니샤드>에서 말한 '범아일여(梵我一如)'나 성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성즉리(性卽理)'처럼 우주의 절대적 법칙과 인간의 본성을 동일시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다석 류영모가 주장했듯이 그리고 뇌과학에서 DMN(Default Mode Network)이 꺼졌을 때 사람들이 느낀다고 하는 '모든 것은 하나'를 근본으로 두어야 할까? 잠깐만 생각해도 이렇듯 수많은 가능성과 선택지가 있기에 섣불리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말하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본성을 꿰뚫을 수 있는 브랜딩, 혹은 마케터의 관점을 끊임없이 추궁당하듯 질문받게 된다면 일단 간단하고 간편하게 '인간은 스스로를 모른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것 같다.
분석심리학자 칼 융이 말한 '나도 나를 모르는 마음(무의식)과 내가 아는 나의 마음(의식)을 조화롭게 통일시키는 자기실현(Selbstverwirklichung)'의 과정에서 '브랜딩'이 일조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한다면 너무 거창하려나? 암튼 누군가에게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할 것을 끊임없이 재촉당한다면 일단 이렇게 말하고 더 깊은 고민을 할 시간을 벌 것 같다.
브런치에서 글을 쓸 때는 책 읽는 것을 무지하게 싫어하던 20대의 나를 독자로 상정하는 편이다. 이번 글은 그러한 독자를 상정하지 않고 기존에 브런치를 대하는 태도도 벗어던진 채 아주 자유롭게 '종횡무진' 적어보았다. 이러한 글쓰기가 읽는 분들에게는 어떻게 다가갈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쾌감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가끔씩 창문을 환기하듯 내가 정해놓은 경계를 다 열어버린 채 써봐야겠다.
다시 한번 나에게 좋은 글감을 준 댓글러 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이 주제에 대한 글은 이것으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