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즐겨 읽는 우리들은 이러한 위기를 잘 극복하고 있다는 셀프 '우쭈쭈'인지, 아니면 문해력의 위기를 극복한 우리가 이러한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도와 주워야 한다는 '으쌰으쌰'의 일환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문해력의 위기'는 자주 언급되는 주제다.
일단 이야기를 계속하기에 앞서 '문해력'이 무엇인지 그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자.
문해력(文解力) :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
- 네이버 국어사전 중 -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문해력은 크게 두 가지 능력을 요한다. '글을 읽는 능력'과 '이해하는 능력'. 한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 현재 대한민국에서 이슈가 되는 문해력의 위기는 결국 이해력의 위기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사실 문해력의 위기는 과거가 더 심각했다. 예전에는 문해력의 위기가 단순 이해력의 문제가 아닌 '글을 읽는 능력'의 문제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현재는 대부분의 매체에서 한글만을 쓰거나 필요할 경우에만 한자와 로마자를 보조적으로 쓰지만, 90년대 이전만 해도 한글과 한자를 섞어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한자를 잘 모르는 사람의 경우에는 이해는커녕 읽기도 힘든 것이 신문이었다. 나의 어렴풋한 기억에 따르면 그 당시에는 문해력의 위기라는 말보다는 '신문도 읽지 못하는 청소년들 이대로 괜찮은가?'와 같은 말로 그 위기(?)를 표현했던 것 같다.
공무원 '숙정' 이후 세태를 다룬 본 지 1980년 12월26일자 1면 보도 자료=중앙DB
한자만 쓰는 경우가 사라지면서 '글을 읽는 능력'과 관련된 문제는 깔끔하게 해결됐다. 다만 최근에 화제가 된 '심심(甚深)한 사과 논란'(심심한 사과를 지루한 사과로 받아들인 네티즌이 꽤 많아 논란이 되었다)처럼 한글로 표기하는 한자어는 읽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이해하는 데는 여전히 문제가 있다. 특히나 그러한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1020세대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지금 문해력의 위기라고 부르는 현상의 원인 중 하나가 이것이지 않을까 싶다.
사실 이는 오래전부터 예견된 일이다. 글을 쓸 때 꼭 한자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의 주된 근거가 이처럼 동일한 한글이 다른 의미를 나타낼 때 읽는 사람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모든 매체는 빠르게 한글화 되었다. 이로 인해 모두가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모두가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인류의 역사를 길게 펼쳐놓고 보았을 때 문해력의 위기는 기본값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중이 뛰어난 문해력을 갖춘 것이 오히려 극히 예외적인 상황이라는 것이다.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참고하자면문해력이 대중의 기본 소양이었다고 말할 수있던 시기는 스크립투라 콘티누아(Scriptura Continua)와 하이퍼텍스트(Hypertext) 사이의 찰나였지 않나 싶다.
스크립투라 콘티누아를 쉽게 설명하면 '공백이나 기타 부호를 활용한 띄어쓰기가 없는 형태의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스크립투라 콘티누아 하에서 독자는 "아버지가방에들어가셨다"와 같은 문장을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셨다"로 읽을지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셨다"로 읽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글을 읽어야 했던 것이다. 띄어쓰기가 없다 보니 소리 내서 읽는 것이 기본이기도 했다. 일부 지식인들이야 글을 제대로 읽고 파악할 수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에 몰입하기도 제대로 이해하기도 힘든 시대였다.
띄어쓰기와 소리 내지 않고 읽는 묵독이 대중화되면서 '문해력'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능력이 상당히 높아졌다. 하지만 이 또한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다시 곧 위기를 맞게 되었다.더 정확히는 앞서 말한 하이퍼텍스트로 인해서 말이다.
하이퍼텍스트를 거칠게 표현하면 '수많은 정보가 링크로 연결된 텍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인터넷에서는 정보를 접할 때 클릭 한 번이면 그와 관련된 다른 페이지로 쉽게 넘어갈 수 있다. 단어의 의미가 궁금하면 클릭 한 번이면 뜻을 알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의견이 궁금하면 댓글창을 클릭하면 그와 관련된 의견을 볼 수 있다.
언뜻 보면 정보의 확장을 돕는 것처럼 보이는 하이퍼텍스트의 문제는 우리의 주의력을 끊임없이 분산시킨다는데 있다. 스크립투라 콘티누아가 글을 읽을 때 끊임없이 "어디에서 끊어서 해석해야지?"를 고민하게 만들듯이 하이퍼텍스트는 링크로 된 무한한 선택지를 끊임없이 제안하여 독자의 부주의함을 극대화시킨다(대부분의 인터넷기업이 이를 원하기도 한다. 유저가 여러 사이트를 돌아다녀야만 광고비를 더 많이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요약하자면 예전에는 스크립투라 콘티누아라는 방해꾼, 요즘에는 하이퍼텍스트라는 방해꾼 때문에 독자들이 글을 집중해서 읽고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이러한 방해꾼 사이에서 글을 읽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해력의 위기라는 현상이 인류사 전체에서는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문해력의 위기가 아니란 말이냐?"라고 묻는다면 나의 답은 "잘 모르겠다"이다. 다만 굳이 말하자면 이 현상을 그렇게까지는 심각하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랄까?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고대 이집트 벽화에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는 구절이 발견되었다고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젊은 세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무한한 걱정과 우려(?)는 변치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영화 <인터스텔라>의 명대사처럼 어떠한 문제건 젊은 세대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러했듯.
문해력의 위기 또한 젊은 세대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잘 헤쳐나가리라 본다. 어쩌면 이번 위기를 기회로 삼아 새로운 도약을 할지 누가 알겠는가?
P.S. 기성세대들은 <영구와 땡칠이>를 보고 자란 우리 세대가 바보로 자랄 것을 우려했으나, 다들 잘 살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세대가 어린 세대를 보고 똑같은 걱정을 하고 있으니참 아이러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