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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선생 Apr 12. 2023

책이 읽는다


제목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맞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을' 대신에 '이'를 썼다.


소설가 김훈이 말한 것처럼 한글로 글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조사(助詞)를 운용하는 일이다. '은, 는, 이, 가'와 같은 조사 말이다. 이 얼마 안 되는 조사에 기대기 때문에 한국어는 빈약하면서 동시에 매력적일 수 있다. 제목처럼 단 한 글자만 바꿨는데도 전혀 다른 의미의 문장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책을 읽는다'라는 문장에서 주체는 사람이고 대상은 책이다. 반면에 '책이 읽는다'는 주체가 책이고 대상은 사람이 된다. 무생물인 책이 사람을 읽는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그런데 아주 가끔씩 이러한 책을 만나게 된다. 책을 읽는다기보다는 책이 이끄는 대로 나를 온전히 맡겨야 하는 책. 삶을 뒤흔들어놓는 그런 책을 말이다.


'책이 읽는다'라는 표현은 내가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가 말한 '텍스트가 나를 읽는다'라는 표현을 참조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롯하여 유수의 작가들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책을 즐기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흔하게 경험하고 있는 현상 같다.


"문제를 만든 사고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즉 문제를 만들었을 때보다 '나은' 혹은 '다른' 사고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처럼 어떠한 책은 그 책을 읽고 완전히 이해한 머리로만 이해할 수 있다. 책을 여러 번 읽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마치 '경력 20년의 신입사원'과 같은 모순적인 목표를 달성해야만 이해가 가능하다. 즉 읽는 주체를 '나'에서 '책'으로 넘겨야만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책이 읽는다'라는 것의 의미다.


장자가 말한 '(새로운) 내가 (기존의) 나를 제사 지낸다'라는 뜻의 오상아(吾喪我)에 빗대어 '책'이 '나'를 죽이게 내버려 두는 '서상아(書喪我)'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기존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호불호에 갇혀있으면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내용을 비로소 보게 되는 경험이 바로 '책이 읽는다'이다. 나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새로운 지평선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 이러했던 책 중 몇 권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책이 나를 이끈 화두로만 간략하게.


* 원서로 읽은 책은 원서 기준으로 기입합니다.


1. 테드 창, <Exhalation(숨)>, Vintage, 2020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인간은 어떠한 의미로 살아가야 하는가?



2. 우치다 다쓰루의 <사가판 유대문화권>, 아모르문디, 2011


천재에게 '당연한 것'이 일반인에게 '특수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과연 그것은 어떠한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3. 조용헌, <조용헌의 인생독법>, 불광출판사, 2018


내가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영역은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가?


내가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영역 그리고 관심 있는 영역에서는 '책이 읽는다'라는 경험을 하기 어렵다. 책을 읽는 '나'라는 주체가 공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관심밖의 영역 혹은 이해밖의 영역에서 책을 찾을 필요가 있다.


오늘 서점에 가서 내키지 않는 책 혹은 생각 없이 집어든 책을 읽어보면 어떨까? 나의 삶을 흔들어놓는, 새로운 나로 도약하게 만들 책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를 읽을 그러한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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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UnsplashJaredd Cra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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