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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선생 Apr 11. 2023

오늘도 나의 장례식을 치른다


그건 당신이 잘못 생각하는 것 같은데요?



작년에 한 모임에서 위와 같이 다소 공격적인 뉘앙스의 말을 듣게 되었다.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인간의 몸은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싸우거나(fight), 도망치거나(flight), 얼어붙게(freeze)' 설정되어 있다. 이러한 선택의 순간이 왔음을 심장이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심장박동이 알려준 세 가지 선택지를 모두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나의 장례식을 치렀다. '나'를 죽이고 이야기를 더 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꽤나 긴 시간 이야기를 듣다 보니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되었고, 또한 그에게 전할 새로운 생각도 떠오르게 되었다. 그와 나는 극단의 입장에 서있었기에 합의점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각자가 갖고 있던 분명한 생각의 경계는 다소나마 흐려졌다. '나'를 죽이니 '나'가 탄생했다. 장자가 말한 '오상아(吾喪我)'를 체험한 순간이었다.


吾喪我, 즉 "나는 나를 장례 지냈다"는 이 말을 좀 더 직설적이고 자극적으로 표현하면 '자기살해'라 할 수 있다. 똑똑하건 똑똑하지 않건 모든 사람은 다 각자 세계를 보는 나름대로의 시각, 즉 이론과 지적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기준으로 세계와 관계한다.

그 이론이나 지적 체계들, 가치관이나 신념이나 이념들은 사실 생산되자마자 부패가 시작된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그 부패되고 있는 신념이나 이념을 매우 강력하고 분명한 가치관으로 신봉하면서 그것으로 무장하고 있다. 우리는 각자의 가치관들로 채워져 있는 가치의 결탁물이다.

장자는 가치의 결탁물인 자기를 '아(我)'로 표현하고, 가치의 결탁을 끊고, 즉 기존의 자기를 살해하고 새로 태어난 자기를 '오(吾)'로 새겼다. 가치관으로 결탁된 자기를 살해하지 않으면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드러날 수 없다.

자기살해를 거친 다음에야 참된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등장한다.   

- 최진석의 <탁월한 사유의 시선>(21세기북스, 2018) 중 -


나이가 들수록 생각이 굳는다고들 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봤다. 일단 기존의 지식과 경험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도 대부분의 경우에 큰 문제가 없다. 그렇다 보니 굳이 힘 새로운 의견을 받아들이거나 고려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또한 잔소리를 하는 사람도 급격히 줄어든다. 잔소리를 해도 바뀌지 않을 것을 알아서 그런지, 아니면 잔소리를 해줄 선배들이 점점 줄어서인지는 몰라도 그렇다. 체감상 30대 중반 이후에는 잔소리 면제권이 생긴 듯 주위에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느낌이다.


이러한 이유인해 나이가 들수록 생각은 굳고 기존의 나는 점점 더 공고해지는 경향이 있다. '오상아'는커녕 '아상오', 즉 기존의 내가 새로운 나를 끊임없이 죽이고 제사를 지내는 모양새가 되어버린다.


일본에서는 이를 방지하기 위한 '단나게이(旦那芸)'라는 문화가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은 이를 '부자나 큰 가게 주인 따위가 여기()로 익혀둔 예능'이라 정의한다. 즉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본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무언가를 배우는 행위이다. 이를 통해 자신을 선생님에게 '꾸지람'받는 위치로 내모는 것이다. 우치다 다쓰루는 현재 일본이 부족한 것이 이러한 문화라고 말했는데, 세계 어디든 이렇게 자신을 꾸지람받는 위치에 내모는 문화는 점점 사라져 가는 것 같다. 청소년도 꾸지람받기 싫어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은 오죽할까.


하지만 인간은 '오상아'를 통해 성장해야만 한다. 성장이라는 말보다는 적응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 것 같다. 환경에 끊임없이 적응하는 동물들처럼 인간도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해야만 한다. 다른 말로 기존환경에 최적화된 나를 끊임없이 죽여야만 한다. 그래야 새로운 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테니 말이다. 


나에게 '단나게이'의 방편이자 '오상아'를 체험하게 해주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람과의 대화다. 책을 통해서는 시공간을 초월한 지성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모임에서는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이를 통해 기존의 나를 죽이고 새로운 나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물론 이 과정은 늘 어렵고 불편하다. 가능하다면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결국은 해내야 함을 알고 있다. 유일한 '갱신되는 나'밖에 없으니 말이다.



P.S. 다른 글에서도 밝혔지만 온라인상에서 대부분의 '토론(혹은 설전)'은 '단나게이'로서도 역할하지 못하고 '오상아'를 위한 발판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서로 간의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사진: UnsplashRhodi Lop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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