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
따끈한 믹스커피가 놓였다.
한입 마시자 혈관을 녹이는 달달한 맛이 온몸의 피로를 순식간에 씻어냈다. 나는 “정말 맛있어요.” 엄지 척을 하며 건넸고, 휴머노이드 P-56W는 밝게 웃으며 기뻐했다.
급작스레 맡게 된 모델이었지만, 한 시간째 관찰한 결과 특이 사항은 없었다. 그녀는 기본 ‘집안일’ 프로그램을 착실히 수행했고, 갑자기 방문한 내게 다과를 내놓으며 친절히 응대했다. 곧바로 냉장고를 열어 저녁 식단을 고민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엄마였다. 의뢰인이 문제 삼았던 ‘반복 행동’도 아직 없었다.
"아휴, 도시락을 왜 또 안 가져갔어!"
갑자기 그녀가 폴더폰으로 다급히 전화를 걸었다. 전화 너머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의뢰인일 것이다.
"깜빡했다고? 가져다줄까?"
전화는 금방 끊겼고, P-56W는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어깨가 축 늘어진 채였다. 휴머노이드라지만, 너무도 현실적인 모습이었다.
“저기, 이름이 백, 백사…"
“백사자입니다.”
“그래요, 백사자 양. 아까 이름 듣고 웃은 건 미안했어요.”
“괜찮습니다.”
“오호호, 근데 밥은 먹었어요?”
그녀의 뒤로 보이는 벽시계의 초침은 이제 10시를 지나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나는 적절한 대답을 내놓았다.
“배고파요. 밥 좀 주시겠어요?”
“더는 못 먹어요. 정말 배불러요.”
“그래도… 딸기 사 왔는데…”
그녀는 딸기 팩을 들고 진심으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산더미 같은 밥을 먹은 나였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십 분간 실랑이 끝에 그녀의 딸이 오면 함께 먹기로 타협을 봤다.
생각보다 쉽게 끝나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소화를 시킨다는 핑계를 대고, 잠시 밖으로 나왔다. 가만히 앉아 의뢰인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결국 그녀의 직장까지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다. 걷던 중, ’하트랩 전용‘ 스마트 워치 알람이 울렸다.
-P-56W는 모델은 현재 관찰 단계. 관찰 보고서 1 제출 바람.
외근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김단오의 업무 지시는 늘 빠르고, 간결했다.
그렇게 투덜거리며 몇 걸음 더 옮기다 쉼터 벤치 쪽으로 시선이 갔다. 익숙한 실루엣에 설마 하며 다가가니 진한 딸기향이 퍼졌다.
“홍초빈 씨, 안녕하세요.”
전자담배 연기 속에서 그녀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홍초빈. 내게 골칫거리 사건을 맡긴 장본인이었다.
“이번 정비 요청 건을 맡게 된 정비감사관 사자-05입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가벼운 미소를 유지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직장에 있어야 할 시간 아닌가요?”
초빈은 길게 연기를 뱉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이젠 백수예요, 잘렸거든요.”
“네? 왜요?”
내 물음에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상사를 팼어요.”
아, 그런 방법이.
뜻밖에 해답을 들은 것 같아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언젠가 나도 그 방법을 써먹으리라. 속으로 굳게 다짐하는 사이,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엔 아무 표정도 없었다. 무언가 불안한 기운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만난 다른 의뢰인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엄마, 어떠셨어요?”
질문한 초빈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전자담배를 쥔 손이 약간 떨리는 게 보였다.
“아주 다정하시던데요.”
“다정? 참, 웃기네.”
그녀는 다시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뿌연 연기가 퍼지자,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겨우 3년 같이 산 엄마라는 존재가 고작 그런 다정함으로 정의되지 않잖아요.”
연기 사이로 스며든 그녀의 말투는 차갑고, 냉소적이었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초빈은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폐기해 주세요.”
초빈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나를 응시했다. 그 순간, 그녀의 눈빛 속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슬픔과 어떤 결연함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우리 엄마, 치매예요.”
치매. 그 단어가 귓가에 꽂히는 순간, 나는 단단한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휴머노이드에게 치매라니.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고, 패턴을 인식하며 작동하는 인공지능 로봇이 말이다. 그것은 내가 지금껏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논리적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모순이었다. 그런데 그 모순을 가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은, 정작 기계의 폐기를 요청한 그녀였다.
‘폐기해 주세요.’
의뢰인의 말은 요청처럼 들리지 않았다.
마치 오래도록 꺼내지 못한 고백 같았다.
마음속 깊이 쌓여 있던,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슬픔의 잔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