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사한 봄날 초저녁, 청운동 브루나이 대사관 옆에 위치한 G도시건축 사무실에 참여자들이 건축사와 다른 몇몇 직원들과 함께 둘러앉았다. 잔디밭 마당으로 나갈 수 있는 커다란 알루미늄섀시문을 낸 사무실의 책상에 앉아 마당을 바라보면 무슨 저택의 서재에서 작품을 쓰는 기분일 것 같았다. 천장 없이 노출로 마감해 높아진 실내는 삭막한 차분함을 곁들이며 시원한 개방감을 주었고, 한쪽 가장자리 작지 않은 주방에선 미팅에 필요한 먹거리를 쉽게 내올 수 있었다. 나는 주방의 커피머신에서 아메리카노 커피 버튼을 누르면서 이런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부러워했다. 부러우면 지는 건데, 의문의 1패다.
설계자를 정한 건 설을 열흘 앞둔 2월 초였다. 설계 감리 표준계약서를 이메일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항목과 문구와 가격을 조정했다. C 건축사가 양보한 부분이 있고, 건축주가 포기한 부분이 있어서 넣고 빼고 해서 최종 설계 감리비는 부가세 포함 7,800만 원이다. 건축비의 10%까지 설계비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내게 이 정도는 대만족이다. 설날 직전에 계약서를 작성해서 날인하고 3월 초 봄날로 첫 설계 워크숍 일정을 잡았다. 이렇게 설계 준비 미팅부터 설계사 선정과 계약, 그리고 설계 워크숍까지 한 달이면 될 거 같았는데 두 달 반이 걸렸다.
한 주나 두 주 간격으로 열리는 설계 워크숍은 건축사의 기본 조사와 개별 미팅, 참여자들이 원하는 자기 집 이야기, 그걸 각자 그림으로 그려서 공유하기, 이런 걸 재료 삼아 설계도면으로 반영하고 검토해서 수정하기를 반복했다. 몇 주일이 지나서 참여자들이 원하는 설계가 도면으로 드러났다. 각자의 도면을 가지고 원하는 방향과 층과 평면과 면적을 내놓고는 조율하고 수정해 갔다. 설계 워크숍에는 아동과 청소년도 참석해서 자기 방과 자기 집을 함께 그려 나갔다. 그들도 거기 들어가 살 사람들이므로.
건축주 전원이 일과 활동을 하고 아동 청소년들은 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모두 모이려면 평일 저녁이나 주말이어야 했다. 평일엔 빨라야 오후 7시에 시작해서 금방 밤 10시가 되었고, 모처럼 토요일 오후에 모이면 훅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다. 이 말은 중년의 소장과 달리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의 직원들이 평일에 야근을 한다는 것이고, 토요일 오후 미팅에 그들의 주 5일 근무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일정을 조율하는 내 입장에서는 양쪽 모두의 눈치를 살피는 게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도면 위에서 일인 가구는 비교적 가볍게 움직였으나 구성원이 서넛인 가구들은 해결책을 찾느라 끙끙 앓았다. 넓지 않은 땅에 건물을 올리면서, 허용된 건폐율과 용적률을 1도 어기지 않는 설계를 해서다. 이번 설계의 건폐율은 48.14%, 용적률은 248.92%로 연면적은 지하층 포함 973.96평방미터(295평)다. L건축사가 제시했던 연면적 1,275.92평방미터(386.6평)에 비해 C 건축사는 302평방 미터(91.5평)나 작게 설계했다.
이 비싼 서울 땅에 집을 지으면서 법대로만 하는 이들은 꼬장꼬장한 원칙주의자 들인가? 그럴 리가, 나는 뼛속까지 현실적인 사람이다. 쉽지 않지만 법대로 하자는 데 C 건축사를 포함해서 건축주 모두가 합의한 거다. 관련 법제도가 마음에 들어서가 결코 아니고, 나는 그런 원칙이 실제 건축과정을 안정적으로 만들 거라고 생각했다.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 있는 이런 결정은, 공사를 시작한 직후 예상치 못하게 아랫집이 건축을 중단하라고 가처분 신청을 하고, 준공검사 직전에는 다 지은 집을 철거하라고 소송까지 걸었을 때 제대로 힘을 썼다. 한치 오차 없이 규정대로, 아니 규정 이하로 했으니 걱정할 게 하나도 없었다. 세상에는 차암 별의별 종류의 사람들이 다 살아간다지만, 하필 바로 아랫집이라니 이걸 어쩔!
좁은 면적을 이리저리 쪼개고 옮기는 난도 높은 작업에서, 다른 이의 필요와 욕구를 알게 된 참여자들은 순간순간 양보하고 절충하면서 쟁점들을 하나하나 매듭지었다. 식구가 가장 많았던 K는 방이 여러 개 필요해서 중간층보다는 6층을 원했는데, 45 킬로그램 무게의 덩치 큰 댕댕이를 키우는 P도 6층이 필요했다. 사람 가족이 더 많은 K가 댕댕이 때문에 6층을 포기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참여자들은 거구의 댕댕이가 중간층에 사는 것보다 6층에 사는 게 모두에게 좋을 거라고 여겼다.
내게 중요한 건 층수나 면적이 아니라, 집안 어디에서나 흡연(콜록!)이 가능할 것, 욕조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하늘을 볼 수 있는 욕실, 그리고 손빨래를 할 수 있는 세탁공간이었다. 일인 가구인 나는 3층이고 5층이고 여러 번 옮겨 다니며 위치와 방향과 면적과 모양을 모두 양보했다. 내가 착해서는 절대 아니고, 설계 작업의 난이도를 살짝이라도 낮추기 위해서 그리했다. 이 건물에서 지하 1층부터 6층까지 같은 위치에 있는 건 엘리베이터와 계단실, 그리고 건물 가운데와 가장자리 한편에 둔 두 개의 배관실이 전부다. 나머지 공간은 모든 호실의 설계가 달라서 층마다 면적과 도면이 제각각이다. 이것은 작업자에게 많이 거시기 한 상황일진대, 그들은 몇 주일 만에 놀랍게도 복잡다단한 요구가 반영된 레고 작품 같은 도면을 그려냈다. 엄지 척 리스펙!
확장 없이 지어서 대부분의 방과 거실이 좁기 때문에 천장 매립형 에어컨이나 냉난방기를 넣었고, 3층부터 6층까지의 에어컨 실외기를 엘리베이터탑 위로, 1,2층의 실외기를 건물 1층 옆면으로 배치했다. 덕분에 에어컨 실외기와 배관이 전혀 노출되지 않는다. 6층 집 옥상에는 태양광발전 패널을 설치할 수 있게 공간과 전기 설비를 두었다. 지하층에는 공동 세탁실과 창고를 넣어서 집집마다 부족한 공간을 보완했다.
청소년 K는 다락방 침실을 원했다. 청소년 K는 이번 집 짓기에서 좀 특별한 존재다. 그는 초딩 때 주워들은 공동체 주택 이야기를 잊지 않고 있다가, '그거 언제 해요?'라는 무한 질문으로 바꾸어서 마구 던졌다. 집터를 못 찾아 이야기가 뜸해질 만하면, 이런저런 사정으로 집 짓기를 포기할 만하면 그걸 던졌다. 집짓기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 아무 약속도 K에게 한 적이 없는데도 그랬다. 집을 지으려고 노력하는지 민감하게 지켜보는 그런 눈길이 집 짓기를 만들어간다고나 할까.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바로 그런 거였다. 그 질문은 꺼지지 않는 군불이 되어 몇 년을 살아있었고, 언제부턴가 아무도 그 군불을 나무라거나 꺼뜨리려고 하지 않았고, 어느새 집 짓기는 현실이 되어 있었다. 그는 마침내 4미터가 넘는 천장을 가진 자기 방을 품은 집 짓기에 참여하게 됐다. 그는 과연 다락방 침실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1,2층에선 고민이 생겨났다. 1,2층은 복합적인 공동체 공간이 포함된 공동 사무실과 교회이다. 시간이 갈수록 모두의 고민은 커져갔고 불안도 함께 커졌다. 설계 워크숍이 주는 재미와 즐거움이 그 불안보다 더 컸기에 당장은 문제 되지 않았다. 지금을 즐기자!
나는 설계를 시작해서 공사가 끝날 때까지 이런 부탁을 자주 했다.
"돈, 시간, 위치, 면적 뭐든 포기할 준비를 하세요."
각자가 원하는 집을 같이 지을 때, 가령 상하수도 배관의 길이는, 전망과 채광은 집집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 배관의 차이만큼 분담금을 달리하고, 전망과 채광에 가격을 매겨서 정산을 해야 할까? 물리적으로 어쩔 수 없는 그런 차이를 피할 수 없다면, 그런 차이가 불만이나 손해로 가지 않도록 해야 탈이 없다. 누군가 원하는 걸 얻을 때 그로 인해 누군가 손해를 감수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함정을 피하는 안전한 방법은 정보를 공유하고 충분히 토론한 뒤 모두가 합의하는 거다. 충분한 정보의 공유와 토론 없이 이루어지는 어떤 다수결은, 소수에 대한 다수의 횡포와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 그뿐이랴, 나는 살아오면서 극소수가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얻으려고 다른 성원을 속여서 다수결로 이기는 기막힌 광경도 여러 번 보았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참여자들은 각자의 욕구와 필요, 불만을 감추지 않고 가능한 드러내고 공유했다. 확인된 악재는 더 이상 악재가 아니라고 하지 않나! 아슬아슬한 쟁점에 대해 빛나는 절충과 양보는 그렇게 가능했다. 실제로 나중에 문제가 된 것은, 누군가 드러내지 않아 숨어 있는 그런 부분들이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게 있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사람이다. 크든 작든 어떤 결정에 자신의 유불리를 중심에 놓고 따지기 시작하면, 공동체 주택(cohousing)은 무너질 수 있다.
참여자들의 필요와 욕구가 작은 불꽃을 튀기며 오가기를 두 어 달, 건물의 방향, 각자의 위치와 면적은 도면이 되고, 그 도면들은 합체하여 조감도로 변신해 모습을 드러냈다. 집은 크고 멋지기보다 작고 소박했고, 동시에 아담하고 예쁜 지하 1층 지상 6층의 모양으로 태어날 준비를 했다. 그해 봄의 설계 워크숍은 작은 불꽃들이 모여 피어낸 찬란한 꽃이었다. 엎어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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