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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탓 Apr 16. 2022

설계 준비 끝

집터를 사들이고 나서 집의 밑그림인 설계를 해줄 건축사를 찾았다.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소개받은 여러 건축사들 중에 후보자를 세 명으로 압축했다. 한 사람은 골목마다 있는 다세대 주택을 많이 작업해 본 이, 또 한 사람은 젊고 도전적이라고 평가받는 이, 마지막 한 사람은 한옥에 기반하는 작업을 많이 하는 이다. 세 건축사에게 거마비와 회의비를 지급하면서 며칠의 간격을 두고 각각 설계 준비 미팅을 가졌다.


미팅을 하기 전에 셋 모두에게 대지의 위치와 면적, 기본 정보를 전달했다. 위치는 서대문구 홍은동 000번지, 대지면적은 294.5평방미터, 제3종 일반주거지역이고 일반미관지구이며, 허용 건폐율은 50% 이하, 용적률은 250% 이하다. 보통사람들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게 뭔데?' 하겠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몇 가지 정보를 알면 촤르르 자동으로 계산이 나온다. 그밖에 이번 건축에 참여하는 건축주는 여러 명이고, 공동체주택(cohousing) 방식으로 지을 것이며, 설계와 시공 기간 내내 여러 차례 워크숍과 미팅을 가져야 한다는 조건을 전했다.


가장 경험이 많고 관할 구청과 오랫동안 작업을 해 본 L건축사는 표지 포함 A3용지로 10매짜리 자료를 만들어와서 참여자들에게 나눠주고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는 건축면적 954.33평방미터(289.2평), 지하실 포함 1,275.92평방미터(386.6평)를 지하 1층 지상 7층으로 조성하고, 3층까지 근린생활시설, 4~7층에 9가구를 지을 수 있다고 제시했다. 


이 건축사의 한 방은 4~7층 주택의 도면에 점선으로 그려져 있는 선이었다. 점선까지가 법이 허용하는 허가면적이고, 그 선을 지나서 실선으로 그려진 실면적이 있다. 그렇다면 주택의 실면적은 허가면적보다 20%~30%가량 넓어진다. 마법이다! 단 준공검사를 받은 뒤에 추가 공사가 필요하다는 조건이 붙는다. 그제야 참여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했다. 아마도 서울시내 대부분의 다세대주택들은 이렇게 지어지는 모양이다. 설계비는 감리를 포함하여 4,500만 원이라고 했다. 추가로 지어지는 두 가구를 일반 분양해서 팔면 참여자들의 공사비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ㅎㅎ


며칠이 지나 가장 젊은 Y건축사와 미팅을 했다. Y건축사는 세 건축사 중 가장 유연해 보였다. 그는 자료를 준비하지 않은 이유를 꺼내며 미팅을 시작했다. "여러분들이 건축을 공동으로 진행하는 공동체 주택을 짓겠다는 거라, 제가 뭔가를 제시하는 것보다 여러분이 궁금해하는 걸 풀어드리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참여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다른 답변들도 비슷했다. 참여자들이 원하는 걸 대부분 수용할 수 있다고 한 Y건축사가 제시한 설계와 감리 비용은 6,000만 원이었다.


마지막으로 세 건축사 중 중간의 나이면서 꽤 알려져 있는 C건축사는 직원 몇몇과 함께 왔다. 다른 둘과 달리 뭐랄까 건축에 대한 철학이나 건축가로서의 개성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설계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고, Y건축사와 비슷하게 공동체 주택 설계에 참여자들이 각자 원하는 건축 방향을 건축사가 미리 제안할 수는 없다고 했다. 주로 한옥을 기반으로 작업을 해왔던 그는 아래층이 생활근린시설이고 위에 주택이 있는 복합건물을 설계해 본 적은 없고, 하지만 자신이 한 번 도전해보고 싶은 작업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설계를 맡게 되면, 참여자들이 건축사의 의견을 존중해달라는 말로 마무리한 그가 제시한 설계와 감리비는 총액 8,800만 원이었다.


세 건축사와 설계 준비 미팅을 마치자마자 나는 쿠알라룸푸르를 경유해서 카트만두로 날아갔다. 혼자 지내야 하는 알츠하이머 환자 엄마가 걱정스러웠지만, 아직 초기인지라 큰 위험은 아니겠다 싶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트래킹을 선택했다. 10년 전 갔던 히말라야 트래킹에서 베이스캠프까지 가지 못했고, 그래서 베이스캠프까지 꼭 한 번 가고 싶었다.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집 지으면 십 년 늙는다."는 경고를 많이 해 왔기에, 심지어 여럿이 같이 짓는다니 말도 안 된다고 하기에, 그걸 견뎌낼 힘을 나 혼자 마주하는 설산에서 찾아보려고 했다. 히말라야 트래킹에서 고도 2,000미터는 보통이고 조금 높다 싶으면 고도 3,000미터다. 매일 1,000미터 이상 오르내리니까, 북한산이나 관악산을 매일 두 번 정도 다녀온다고 보면 된다. 고도 4,150미터의 베이스캠프는 ABC트래킹의 정점이자 마지막이다.



히말라야 트래킹의 고도가 높으니까 무슨 대단한 걸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전혀 아니다. 서울의 북한산이나 관악산을 오를 수 있는, 아니 절반만이라도 오를 수 있는 누구나 히말라야 트래킹을 할 수 있다. 약간의 위험이 있다면 3,000미터 이상에서는 고산병이 올 수 있어서, 혹시 걷다가 머리가 지끈거리거나 숨이 차오거나 어지러우면 그곳에서 하루 이틀 쉬고 나서 계속 가면 된다. 그 하루 이틀이 아까워서 안 쉬고 계속 걸으면? 끔찍한 고통과 후유증을 겪거나, 심한 경우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 히말라야 트래킹은 11월부터 2월까지, 그러니까 네팔의 겨울에 해당하는 기간이 성수기인데, 반팔 반바지에 샌들만으로도 가능하다!ㅋㅋ 3,500미터 이상 고지대에 머무르는 며칠 동안은 따스한 아우터와 침낭이 꼭 필요할 뿐이다. 열흘 동안 산악 트래킹을 하며 덜어내고 비우고를 수 없이 반복했다. 히말라야는 나의 지식과 경험과 정서와 체력과 재산과 인간관계 모든 것들이 그저 한없이 가엾고 가벼운 것임을 알려준다. 이 깨달음으로 이삼 년은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베이스캠프에 갔다가 산을 내려와서 인터넷이 되는 곳에 도착했을 때, 밀려있던 그룹 챗방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산에 오르기 전 세 분의 건축사 중 한 분을 참여자들이 정하면 그대로 따르겠노라고 했는데, 참여자들은 설계자를 누구로 할지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정을 하기에 필요한 정보가 부족하다는 게다. 더 알고 싶은 게 있다는 분들의 질문을 받아서, 느릿느릿한 와이파이를 경유해서 세 건축사에게 이메일로 추가 질문을 보냈다.


한 달여 만에 서울로 돌아온 나는, 세 건축사의 답변을 가지고 곧바로 설계자를 정하는 미팅에 합류했다. 나혼자 고르라면 Y-C-L 건축사 순서였는데 다른 참여자들은 C건축사를 선호했고, 나 또한 그걸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평소에 줏대 없이 소심하게 사는 편이라 가장 유연한 Y건축사를 앞에 두었을 뿐, C건축사가 비용은 부담스럽지만 소통과 신뢰라는 측면에서 장점이 많았다.


L건축사로 가면 비용 부담이 확 줄고 공간이 넓어진다는 장점이 있고, 그러나 사람이나 도면이 매우 정형화되어 있어서 참여자들의 다양한 욕구를 반영하기 힘들어 보였고, 실제로 지어진 결과물도 만족스럽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컸다. 집 짓기를 준비하며 여기저기 걸려있는 분양 현수막을 따라 들어가서 다세대 주택을 둘러본 참여자들은, 이왕 지을 거 이렇게는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은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 다세대 주택을 지어서 팔고 끝낼 사람이라면 당근 L건축사인 거고, 내가 들어가 살 거라면 그게 아닌 거고. 모두의 의견을 모아 보면, C-Y-L 건축사의 순서였다.

만장일치로 C건축사 승!


그 결정을 한 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아니, 하나같이 전세 보증금 밖에 없으면서 뭘 믿고 젤 비싼 건축사를 ㅋㅋ. 하여튼 좋은 건 알아서'라고. 난 웃자고 하는 소리지만 듣는 사람은 기분 나쁠 거 같아 말로는 못했다. 그땐 값비싼 설계비에 대한 부담이 살포시 있었으나, 뒤에 길고 긴 다이내믹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 돌아보니, C건축사로 정한 이날의 선택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집단 지성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나는 C건축사에게 선정 결과를 먼저 알려 후속 미팅을 잡았고, 다른 두 건축사에게도 결과를 알리며 양해를 구했다. 건물의 밑그림을 그려갈 준비는 끝났다. 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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