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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탓 Apr 19. 2022

초여름밤의 꿈

춘삼월에 시작한 설계 워크숍은 오뉴월이 올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처음부터 C 건축사는 넉넉한 작업 기간을 요구했고, 참여자들은 생각보다 긴 설계 작업 기간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이견을 달지는 않았다.


"몇몇이 밤샘 작업하면 일주일에 할 수 있는 일 아니야?"

"아이 참 그 사람들, 후딱후딱 좀 하지 젊은 사람들이 왜 그래."


참여자들은 기껏해야 이 정도로 불만 섞인 한 두 마디를 던지는 게 전부였다. 설계 워크숍이 시작되어 각자가 원하는 집을 발표하고, 한 집 한 집 돌아가며 묻고 답하고, 나온 이야기들을 재료 삼아 설계도를 그리고, 나온 도면을 바탕으로 층과 방향을 정하고, 그걸 같이 검토하며 수정하기를 두 어 달 했다. 처음에는 홍은동의 모임방과 청운동의 G도시건축 사무실에 번갈아 모이다가, 5월 들어서는 참여자가 G도시건축과 개별 미팅을 하면서 설계 워크숍은 마무리되어가는 듯했다.


그때 나의 꿈은 7월 초에 건축신고, 8월과 9월에 철거와 착공, 9월에서 11월까지 골조공사, 12월 마감공사를 시작한다는 야무진 것이었다. 생각만으로는 집 짓기가 벌써 끝나간다. 이렇게 쉽게 집을 짓다니, 나는 참 행운아다. 내게는 집 짓는 거 그거 별거 아닐지 모른다. 시즌1에 완결되는 이야기, 완성도 높고 과정은 즐겁고 결말로 해피엔딩을 담아내는 이야기.


세 달째 접어드는 설계 작업에서, 교회가 전체를 사용할 1층의 층고는 5미터로 높아졌고 2층의 절반 가량도 교회가 사용하게 됐다. 공동 김장과 장 담그기를 하고 아이들이 뛰어놀 1층의 마당은 건폐율 50%를 꽉 채운 1층 때문에 사라졌다. 서울의 계절은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가며 달궈지는데 설계 워크숍은 거꾸로 식어가고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1,2층 설계를 이야기하는 순서에서 오가는 말들은 점점 차가워지고 줄어들었다. P목사와 그의 부인 L목사, H교회 건축위원은 번갈아 워크숍에 참석했는데, 그들은 다른 공간을 이야기할 때는 풍부한 상상력과 알찬 도움말을 건네다가, 교회 공간을 다룰 때에는 긴장한 모습으로 다른 참여자들에게 허용적이지 않았다. 완연한 초여름에 들어선 5월 중순 따스하고 활발하던 그룹 챗방은 싸늘해졌고, 각자 개별 미팅을 한다는 이유로 설계가 어떻게 변경되었는지 서로 모르는 일이 생겨났다. 정색을 하고 언쟁 직전까지 가는 일도 생겼다.


이번 달 건축심의위원회도 포기하고 있던 유월의 첫 금요일 밤, 길어진 초여름 해가 떨어지고 나서 내가 저녁밥을 먹고 한 숨을 돌리려는 데 P목사가 전화를 해왔다. 오랜만에 하는 통화라 어색할까 싶어 나는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목사님!"

"네 K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별일 없으시죠?"

"하하 네 별일 없어요. 무슨 하실 말씀 있으세요?"


P목사에게 연락하는 건 주로 나였다. 내가 서너 개의 문자를 보내면 한 번 답문자가 오고, 열 번을 전화하면 한 번 통화에 성공하곤 했다. 보통 그러던 것이, 5월에 들어서 P목사는 전화도 문자도 카톡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뜬금없이 불쑥 내게 전화를 해오다니 무슨 일일까 궁금했다.


"네 우리 교회는 교인들이 있어서 무슨 결정을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요즘 설계 때문에 골치가 아프네요."


그는 교회가 워크숍을 할 거고, 그 워크숍에서 설계에 대해 결정을 할 거라고 했다. 그러고는 알맹이 없는 대화가 십여 분을 오갔다. 나는 설계에 대한 참여자들의 합의 수준이 점점 낮아져서 걱정이 태산이 되기 직전인데, 그는 '이 고비를 잘 넘어서 건축 잘해 보자'는 마무리 덕담을 늘어놓는다. 대화 상대방이 아름다운 단어들을 나열하면, 그 말에 반대하는 의견을 건네기가 쉽지 않다. 나는 통화 중에 계속 '네네'를 반복했고, 그는 축복 가득한 인사말로 전화를 끊었다.


며칠   교회의 장로 부부가 교회의 워크숍에 다녀와서 전해  말로는, 워크숍에서 P목사와 H건축위원은 건축을 간단하게  마디 하고 그냥 넘어갔다.  부부는  짓기에 참여해서 자기 집을 같이 짓는 입장이라 워크숍에서 유심히 살폈지만   마디가 전부고 어떤 결정도 없었고, 교인 중에 누군가 '목사님과 장로님이  알아서 하세요.'라고 당부의 말을   전부라는 거다.


그 해 1월 설계자를 선정하기 전부터 나는 교회 교인들과 함께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설계 워크숍도 같이 하자고 모임에서 여러 번 제안했던 터였다. 같은 건물에 같이 지낼 사이에 미리미리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고 이르다며, 교인들이 대부분 고령자라며, 일주일에 한 번 오는 교인이 많다며 여러 이유로 여섯 달 동안 나는 다른 교인들을 만나지 못했다. 모임에 나오는 목사 부부와 건축 위원, 그리고 장로 부부가 모두 교회 사람들이니까 나는 '별 문제없겠지'라고 속에서 커져가는 불안감을 다독여 왔다. 다독여 온 그 불안감이 '설계, 교회, 교인, 워크숍'이라는 단어 때문에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왜 주말 저녁에 내가 밑도 끝도 없는 축복을 받아야 하는 거지?' 머리를 맴도는 질문은 나로 하여금 금방 나눈 대화를 곱씹어보게 했고, 짧지 않았던 통화가 무얼까 하는 문제풀이로 나를 이끌었다. 몸은 지치고 노곤해서 축 늘어지는데 이대로는 편히 잠들 수 없다. 뭔가 답이 나올 듯 아닐 듯 머릿속에서 혼자 밀당을 해보았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안 좋다. 시간마저 갑자기 느릿느릿 가며 충분히 따져보라고 하는 것 같다.


혹시? 하는 마음에, G도시건축의 부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주말 밤에 그는 전화를 받아주었다.


"부소장님 안녕하세요! 밤늦게 죄송해요."

"아, 네. 괜찮아요."

"퇴근하셨죠?"

"네 퇴근했어요. 하하"


나는 좀 전에 P목사가 내게 전화를 해왔다는 말을 전하며, G도시건축이 교회와 설계 미팅을 잘 진행하고 있는지, 혹시 무슨 이슈가 있는지 물었다. 부소장은 전 달 일요일에 한 번 교회를 방문해서 몇몇 교인들과 함께 미팅을 가졌다고 했다. '한 번?' 5월 내내 개별 미팅을 주로 했는데, 교회와 설계 미팅을 한 번 밖에 안 했다니. 나를 포함해서 다른 참여자들이 설계 워크숍에서 교회에 건넨 제안이 한두 개가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가?


"아 그래요? 그러면 이슈들이 좀 정리가 됐겠네요. 그럼 이번 건축심의엔 어렵고 다음번엔 낼 수 있는 건가요?"


넘겨짚은 나의 질문에 부소장은 답하지 않고 잠시 침묵했다. 나는 속으로 '뭐야 왜 그래? 빨리 그렇다고 말해!' 소리치며 대답을 기다렸다. 부소장은 잠시 뜸을 들이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 그게 좀. 오늘 목사님이 이번 심의에 넣기로 했다고 하시던데요. 저는 그래서 이번에 넣기로 하신 줄 알았어요."


부소장은 자신이 금방 한 말이 부담스러웠는지 자신의 말을 다른 참여자들에게 전달하지는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실무자가 업무상 알게 된 사실을 남에게 전달할 때는 참으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부담스러운 작업을 하고 있는 건축사 사무실 담당자에게 업무 이외의 부담을 주면 안 된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그냥 내놓으면, 어떤 사람들은 달을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그 손가락'을 문제 삼는다. 나는 그런 실무자의 고충을 잘 알고 있었고, 그건 걱정 말라고 약속하고는 이번 달 심의에 내자고 결정한 적은 없다고 전하고 통화를 끝냈다.


이 무슨 결정적인 순간이란 말인가. P목사는 합의되지 않은 설계를 가지고 남의 이름으로, 그러니까 바로 나의 이름으로 건축신고를 하려는 거다. 내가 주말 저녁인 지금 확인하지 않았으면, 부소장이 전해주지 않았다면, G도시건축은 주초에 열리는 건축심의위원회에 작업 중인 설계도로 건축 신고를 할 뻔했다. 작업의 편의를 위해 내 목도장 하나를 건축사 사무실에 맡겨두고 있어서 그건 쉬운 일이었다. 교회 워크숍 얘기는 또 뭐란 말인가. 그에게 왜 나와의 통화가 필요했을지 짐작이 갔다.


'하, 이거 참 어쩐다. 이걸 어쩌지.'


그날 밤, 나는 진한 담배 연기로 고민을 태우고 또 태웠다. 잘못하다가는 일이 엎어질까 봐 두려웠고, 그렇다고 계속 갔다가는 더 감당 못할 일이 생길 수 있고, 뭉개고 넘어갈 방법은 안 보이고.


모두가 빨리 설계를 완성해서 건축신고를 하고 착공하기를 바랐다. 그게 이번 달이면 당근 더 좋다. 문제는 그 설계에 이견이 많고, 단순히 이견이 많아서가 아니라 논의하는 과정과 합의가 지지부진하다는 데 심각성이 있었다. 착공 전 설계에서 이런 문제를 안고 시작하면, 그 설계가 건축물로 드러나는 시공 과정에서 더 많은 문제가 생길 건 뻔한 스토리다.


이걸 말로 해결하는 방법은 모르겠다. 이럴 때 나 같은 인프피(INFP)들은 맞서거나 각을 세우지 않는다. 내가 그냥 참거나 손해보고 넘어가면 좋으련만. 섣불리 건드리면 안 되고, 내가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건 분명해 보인다. 아, 미치겠다. 구름에 가려진 설산이 떠올랐다, 구름으로 덮어 씌워진 들 자기 모습을 말없이 있는 그대로 지니고 있던 산.


'더 기다리는 게 좋겠어, 그 산처럼.'


P목사가 자기 말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분명했다. 합의되지 않은 설계도가 구청에 들어가는 순간 그 도면은 건축 신고에 들어간 설계도가 되고, 한 번 굳어지게 된다. 그때부터는 쉽게 수정할 수 있는 설계도가 아니라 공식 문서가 된다. 소위 '기정 사실화' 하는 거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다. 설계 변경을 하면 되지 않냐고? 흐흐, 건축신고라는 행정과정이 그렇게 유연하지 않아서, 설계 변경은 정말 사소한 게 아니고서는 쉽지 않다. 용어는 신고제인데 내가 신고하고 변경하면 끝나는 게 아니고, 창문 하나의 위치를 바꾸는 데 한 두 달이 걸린다. 층고를 출입문 위치를 평면을 입면을 변경하는 건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픈 일이고, 배보다 배꼽이 커질 수 있어서 차라리 새로 건축 신고를 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이제 지금의 설계도를 수정하고 합의해서 6월은커녕 다음번 건축심의위원회에 제출하는 것도 불투명해졌다. 초여름 밤의 꿈이 더운 날 아이스크림 녹듯이 사라져 가는 기분이다. 이 집 짓기는 꿈만 꾸다가 끝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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