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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탓 Apr 21. 2022

헤어지고 엎어지기

무더위를 벽걸이 에어컨이 달래주는 여름밤, 방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흐르는 땀보다 백만 배 정도 더 땀나는 숙제를 앞두고 긴장하고 있었다. 오늘은 공동체 주택을 지어보자고 모인 참여자들이 지난 다섯 달 동안 설계를 준비하고 워크숍을 해오면서 점점 민감해지고 소원해지고 불편해지다가 마침내 헤어지는 방법을 정하기로 한 날이다. 지난 모임에서 사업 중단을 결정했고 다음 모임인 오늘은 방법을 정하기로 해서, 모두 불편한 마음 한 가득이다.


6월 모임에서 내가 진행 보고를 하면서 설계를 수정해서 7월에 건축신고를 제출할 수 있다고 하자,


"아니, 이번 달에 신고를 안 했어요? 넣기로 했잖아요."


두 눈을 크게 뜨면서 P목사는 놀란 듯이 말했다.


"이번에 넣기로 한 건 아니에요. 1,2층에 결정 안된 부분이 많아서요."


정색하고 낯빛이 변한 그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냥 삼켰다. 이런 상황에선 액면에 드러나는 것보다 표정 눈빛 손짓 몸짓처럼 비언어적 메시지가 더 많다. 그가 뭐라고 말하려는 지 내가 알 수는 없었다. 혹시 그가 꺼내지 못한 말이 지난 주말 그가 부소장과 나랑 나눈 이야기에 대한 것인지 궁금하기는 했다. 그걸 내가 물어볼 수는 없고, 건축 신고를 하기로 결정한 적이 없는 사람들과 같이 있으니 그가 없는 결정을 있다고 할 수도 없다. 그날 이후로 모임에서는 1층에 대해 겉도는 논의가 반복됐고, G도시건축의 설계 작업은 멈췄다.


집을 지을 때 참여자들의 욕구와 속내가 드러나는 지점들이 많다. 건축시기와 입주기간, 위치와 주변 환경, 실내외 면적, 들어가는 돈, 같이하는 사람, 건물의 설계, 공간의 용도 등 각자에게는 다 이유가 있다. 그중 하나인 건물의 설계 작업에서, 참여자들의 속내는 도면이라는 그림으로 자세하게 그려진다. 모양과 질감과 무게 같은 물리적인 형태가 없는 상태이지만, 건물의 뼈대와 살과 모양을 결정하는 도면을 보면 상상력 수준에서 많은 걸 알 수 있다. 나의 욕구가 설계 워크숍이라는 블랙박스를 통과한 뒤에 다른 집으로 간접흡연 피해가 가지 않도록 가장 구석진 자리로 결정되듯이 말이다.


1년 전 공동체 주택 참여자들이 확정되어 새집을 짓기로 했을 때, 참여자 중 한 사람인 작은 교회의 P목사는 일주일 중 하루인 일요일, 그것도 겨우 반나절만 사용하는 예배당을 주민에게 공동체 공간으로 내어 놓겠다고 했다. 그는 일주일 내내 비어있는 예배당이라는 공간이 아깝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드나들고 거기에서 뭔가를 하면 좋겠다며, 요즘은 교회 십자가만 걸려있어도 주민들이 드나드는데 불편할 수 있으니 건물 외부에 십자가를 걸지 않겠다고 했다. 그의 작은 교회 외부에는 정말로 아무런 십자가도 걸려있지 않았고, 다른 참여자들은 그의 뜻이 그런 줄로 알았다.


내 주변에서 교회랑 같이 집을 짓겠다면 다시 생각해보라는 이들이 꽤 있었고, 몇몇 참여자는 교회가 입주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집짓기 모임을 빠져나가기는 했다. 나는 이 교회는 좀 다르다고 설명하며, 그런 걸 넘어설 수 있는 장애물이라고 여겼다. 아니, 나는 그렇게 여기고 싶었는지 모른다.


제안서를 낸 세 건축사들의 제안이 건축면적으로는 30% 이상, 설계비로는 90% 차이가 났지만, 그중에 가장 좁은 연면적으로 가장 높은 가격에 설계하겠다는 건축사에게 작업을 맡기기로 정한 건 건축 자금이 넉넉해서가 아니고, 참여자들이 원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C 건축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신중하고 꼼꼼하게 설계 워크숍을 진행했다. 워크숍이 진행될수록 막연하고 추상적이었던 참여자들의 욕구는 자신이 원하는 설계에 짜잔 하며 모습을 드러냈고, 다른 사람들의 설계를 보면서 참여자들은 몰랐던 다른 이들의 속내를 더 알아갔다. 매입해둔 땅 때문에 매달 몇 백만 원의 이자를 내야 하는 참여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자금부담이 늘어날지라도 서울 한 복판에 내 집을 내가 원하는 대로 짓는다는 꿈에 부풀어 워크숍을 즐겼다. 시간은 파도처럼 왔다 갔고 밀물과 썰물이 오가던 중, 모두는 큰 파도를 만났다.


모임에서는 각자가 원하는 만큼의 면적에 원하는 대로의 모양대로 집을 짓기로 했고, 그에 따르는 기간과 자금을 각자가 책임지기로 했다. 크고 넓게 짓고 싶으면 그런대로, 작고 아담하게 짓고 싶으면 또한 그런대로. 필요한 결정을 할 때에는 크든 작든 충분히 따져본 뒤 만장일치로 결정하고, 쟁점에 대해서는 각자의 면적이나 분담금과 상관없이 1인 1표 방식으로, 그러니까 돈보다는 사람 중심으로 의사를 결정했다.


설계 워크숍이 중반을 넘어설 즈음 교회가 원하는 면적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예배당과 모임방이면 충분하고 사무실은 2층의 공동 사무실에 입주하겠다고 하더니, 설계 워크숍이 진행되면서 목사 사무실, 청년부실, 학생부실, 기도실, 주방 겸 작은 카페가 추가됐다. 연면적의 26%로 시작한 교회의 면적은 30%를 넘어섰고, 교회가 들어서는 1층의 층고를 5미터로 높이고 준공검사를 받은 뒤에는 1층의 일부를 복층으로 조성하겠다고 했다. 이제 6층짜리 이 건물에서, 1,2층의 80%, 전체의 1/3은 교회가 됐다. 작지만 중요했던 1층 마당은 사라졌다. 이런 밀당이 설계 워크숍을 세 달로 연장시켰고, 건축사와 계약했던 설계기간이 다가오도록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이미 설계 감리 계약서의 기한은 지났다.


  지나서는 교회가 가장 많은 건축자금을 내는 것이니, 다른 참여자들이 양보하라고 요구하는 지점 이르렀.  말은 지금까지는 참았는데 앞으로는 계속 그럴  있다는 예고다.  순간 모두가 1 1 만장일치의 의사결정방식이 망가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모임은 깨지지 않고 버틸 기둥을 잃어버렸다.


참여자들은 이 문제를 더 이상 모임에서 다루거나 합의할 수 없음을 확인하고 헤어지기로 했다. 과연 내 집을 지을 수 있을까 하는 불확실성이 덮쳐 왔고, 그와 동시에 내가 원하지 않는 집을 지을 바에 안 하는 게 낫다는 확신이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이 날은 사업 중단에 따르는 수습 방안만 다루기로 했다.


1안, 사업을 중단하고 구입한 대지를 팔아서 각자가 손실을 부담한다. 2안, 교회가 모임에서 빠지고 다른 참여자를 찾아서 사업을 진행한다. 3안, 내가 단독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새로운 계획으로 진행한다.


"교회가 금전적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선에서 1,2,3안 다 좋고, 원금이 빨리 회수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9월 10월까지 이자를 주시는 거죠?"



이날 교회만 이렇게 1,2,3안 어느 것도 상관없다고 했고, 이미 낸 사업비를 돌려받는 날까지 이자를 달라고 요구했다. 우리는 참여자가 그 시점의 자기 분담금보다 초과해서 낸 부분에 대해 연리 2%, 참여자들의 친인척이나 지인들에게는 연리 2.5%의 이자를 지급하고 있었다. 참여자들은 목소리 한 번 높이지 않고 2안으로 진행하는데 합의했다. 헤어지는 방법을 찾는 데 충분한 시간을 가져서였을까, 다행히 사나운 모습 없이 차분하게 어려운 꼭지가 매듭지어졌다. 시간은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시즌1은 제대로 한 번 엎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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