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을탓 May 13. 2022

옷 입는 건물

조적공사

봄이 완연한 사월 중순, 건물 꼭대기까지 골조 공사가 끝났다. 모두 5층인 양 옆의 건물들 사이에, 비슷한 키를 가진 새 건물이 가림막을 두른 채 자리를 잡았다. 도로 쪽에서 보면 같은 5층 건물로 보이고, 6층에는 도로 쪽에서 잘 안 보이는 반대편으로 한 가구가 더 자리 잡고 있다.


G 도시건축은 2층부터 꼭대기층까지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벽돌로 건물에 옷을 입히려고 했다. 설계자는 벽돌 샘플을 보여주며 참여자들에게 선택하라고 했다. 두 개는 아주 살짝 푸르스름한 베이지색, 하나는 엷은 붉은색이랄까 오렌지 색이었다. 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적벽돌보다 얇으면서 기다란 모양이었고, 스페인에서 수입해 오는 제품이라고 한다.



평소에 미적 감각이 젬병인 나는 낯선 색상이 살짝 신기해 보였고, 노안까지 있어서 무엇이든 오래 쳐다보는 게 피곤했기 때문에 참여자들의 의견을 그대로 따랐다. 초이스는 가운데 제품이었다. 기대에 부풀어 제품을 주문했더니 마침 그것만 똑 떨어졌다고 한다. 업체의 창고에 재입고되려면 몇 개 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게 함정이었다.


한 번 입으면 오래도록 입고 있을 옷이라 중요하기는 한데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삼월 입주는 모두가 포기하고 있었고, 한 달씩 입주가 미루어지다가 벌써 사월인데, 유월 중순까지 입주를 미루는 게 모두에게 벅찬 일이었다. K어집은 임대인과의 밀당을 지나 험한 말을 주고받는 한계 상황이어서 더더욱 그랬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같은 색상이면서, 내 눈에는 거의 같아 보이는, 모델번호가 1, 2 다른 벽돌을 구입했다. 이 벽돌은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같은 남부 유럽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집의 지붕과 벽의 색이다. 시공을 해놓고 보니까 그냥 보기보다는 햇빛을 받을 때 더 돋보이는 벽돌이었다.


현장소장은 조적공사를 하기 전에 시스템 창호를 넣어 두어야 누수가 생기지 않는다며 창틀을 먼저 자리 잡아 설치했다. 그의 설명으로는, 시스템 창호의 경우 예전에는 국내 제품과 수입제품의 품질 차이가 컸지만 요즈음에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국내 제품이 더 낫다고 한다. 골조공사의 거액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중상 수준의 Z 제품을 4,400만 원에 구입해서 조적 공사 전에 1차로 창틀을 끼웠다. 소장은 품질에 비해 좋은 가격에 산 거라며 기분 좋아했고, 나는 '뭔 창문에 사천 사백'이라는 독백을 삼켰다.


건물에 옷을 입히는 조적공사가 시작됐다. 콘크리트 겉에 두꺼운 단열재를 속옷처럼 입히고 벽돌을 겉옷으로 입혔다.


지금까지는 눈에 안 보이는 건물의 뼈대와 근육과 속살을 만드는 과정이었다면, 이제 겉모양을 꾸미는 일이고 작업이 진행되는 만큼 눈으로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작업자가 많으니까 며칠이면 되겠지?' 하는 기대는 역시 초보 건축주의 착각이었다. 소장은 추락사고가 없도록 작업자들에게 주의를 주고, 지시한 대로 벽돌이 놓이지 않으면 하나하나 지적해서 수정해가면서 꼼꼼하게 진행했다.



원하는 제품을 구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색상이 약간 바뀐 것 말고 건물 외양에 적지 않은 변화들이 생겼다. 소장은 설계도와 달리 약간의 변화를 주면서 조적 작업을 진행했다. 그는 건축주, G 도시건축에게 몇 가지 변경을 제안했다.


가장 큰 변화는 옆 건물 쪽 외벽을 벽돌에서 스타코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쪽은 옆 건물과 직선거리 2미터 정도로 좁은 통로이고 사람이 다니지 않는 구석이어서 벽체가 훼손될 일이 별로 없었다. 모두가 변경에 찬성했고, 시공을 마치고 보니 벽돌이 아니라는 약간의 아쉬움이 있지만 단순하면서 깨끗해 보였다. 소장은 네 외벽 중 한 면을 이렇게 통째로 바꾸었다. 공사비와 공사기간이 꽤 줄어 들었다.



또 소장은 2층 벽돌을 두 줄씩 들어가고 나오도록 쌓아서 변화를 주고, 2층과 3층 사이에서는 세워서 쌓자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그게 그거 아님?'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소심한 탓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리 하자는데 동의했다. 결과는 많이 나아보였다. ㅎㅎ


설계와 시공 모든 과정에서 나는 '이 건물은 서민형 공동체 주택이니, 기간과 비용을 고려해서 설계하고 시공해달라.'라고 요청해 왔다. 설계비가 비싸서 그렇지, 설계에는 화려하게 멋을 내거나 고급지게 꾸민 구석이 별로 없고, 자잘하게 꾸민 흔적도 거의 없다. 집집마다 다르지만 내부는 좁고 소박하다. 설계는 최선이었고 훌륭했다. 소장은 설계가 건너 뛴 그 허전한 구석을 채워가고 있는 것이다.


소장은 이번에는 1층과 2층이 만나는 지점이 허전하다며 뭔가를 추가하자고 했고, 엘리베이터와 계단실 쪽에 층이 바뀌는 곳에도 구분 선처럼 금속공사를 추가하자고 했다. 공사가 진행될수록 에너지가 점점 바닥나고 있던 나는 계속 그냥 동의했다. 사실 나는 설명을 들을 때 무슨 말인지 대충만 알아들었다가, 나중에 작업을 해놓은 결과를 보면서 '오 괜찮은데!' 하며 속으로 만족스러워했다.


햇빛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겉옷을 입고 가림막을 벗긴 집은 흔하지 않은 모습의 밝고 좀 크면서도 아담한 건물이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이 바뀌어 보는 재미가 있었고, 선을 반듯하게 맞춘 주변 건물과 달리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햇빛이 화사한 날에는 하루 종일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이 집 짓기를 하는 내게 중요할 뿐, 지나가는 사람들은 올려보지도 않고 흘낏 쳐다보고 가면 끝이다!


그밖에 열일하는 소장 덕분에 건물 현관문 위에 물받이가 생기고, 창문마다 위아래로 물받이를 추가하고, 집집마다 있는 환기구가 예쁜 것으로 바뀌고, 4층과 5층 한 구석에 있었던 사선 모양의 연결선이 없어지고 직각 모양이 됐다. 설계를 구현해가는 현장 소장은 그냥 주는 대로 한 게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상상력으로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고 있었다.


변경되고 추가된 몇 가지는 허가사항이어서 나는 G 도시건축과 구청을 드나들며 담당자에게 변경의 이유와 사정을 설명했다. 주변 건물과 워낙 다르게 생긴 건물이어서 그랬는지, 큰 변경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나는 모르겠지만, 모든 변경사항이 받아들여졌다. 내가 집 짓느라 하도 고갯길을 걷다 보니 평탄한 길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 남은 바닥공사, 승강기공사, 창호공사, 소방공사, 전기통신공사, 집집마다 내부 마감공사가 잔뜩이다. 계절의 여왕에서 기후변화로 초여름이 되어가는 오월이 다가온다. 나는 지쳐간다.



#서울에서집짓기 #집짓기 #공동체주택 #조적공사 #벽돌 #시스템창호 #현장소장

작가의 이전글 또 가처분 신청과 소송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