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피아니스트이자 '러시아의 불곰'이라 불리는 거장 에밀 길렐스, 그리고 오이겐 요훔이 지휘하는 베를린필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모든 동곡 음원 중 가장 위대한 연주로 꼽기에 주저함이 없는 불멸의 기록이다. 장엄한 붉은 노을처럼 낭만적인 1악장 호른 도입부는 가장 완벽한 완급을 보여주며 이는 이후 수많은 호른 주자들에게 강렬한 이상향이자 절망과 트라우마를 동시에 안겨준 연주로서 자리매김한다. 이 작품이 연주되는 실연에서 여러 호른 주자들의 긴장감 가득한 실수를 얼마나 수없이 목격해 왔던가. 이는 <말러 교향곡 5번> 1악장 트럼펫 서주에 필적하는 실로 거대한 벽이다.
그들은 단지 1악장 안에서도 단단한 통제력과 경이로운 파워, 그리고 브람스 음악이 지닌 깊은 숨결과 낭만적 감수성 모두를 완벽히 보여준다. 그래서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음악이 2악장 이후에도 또다시 새롭게 흐른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물론 또 다른 낭만과 음악적 감수성으로 말이다.
에밀 길렐스는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또는 슈베르트나 생상스, 그리고 러시아 레퍼토리에서의 모습이 매번 다르다. 브람스는 한 단계 또 다른 세계이다. 무엇보다 분명한 사실은, 그의 모든 연주들이 가히 독보적이라는 사실이다. 비르투오조 최고봉의 솜씨로 빚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에서는 팔색조의 타건이 폭발적으로 샘솟듯 터져 나오며, 칼 뵘-빈필과 연주한 불후의 명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7번>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그가 연주하는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는 놀라운 러시안적인 풍모를 담고 있다. 그리고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은 가장 독일적인 사운드와 음악에 깃든 감성, 브람스 낭만성의 진수가 절절하게 녹아 있다. 그의 가슴속에는 모든 예술적인 정수가 흐르는 듯하다. 그래서 길렐스는 단지 러시안이 아닌 범세계적 음악성을 지닌 불후의 전설이자 '건반의 신'인 것이다. 함께 수록된 <브람스 판타지> 전 7곡은 '피아노 협주곡'의 거대하고 두터운 사운드와 완벽히 상반되는 감미롭고 단아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고막 가득 울려주었던 심포닉 한 음향적 포화를 중화시켜 주는 청명한 소리는 환상적 감성과 음악의 맑은 물줄기에 씻겨지는 쾌감을 안긴다. 브람스 음악이 주는 깊은 정화감은 길렐스의 손끝에서 비로소 찬란히 빛나는 순간으로 승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