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년 후의 미래가 유토피아일 것이라 생각하느냐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
미래를 물을 때 우리는 종종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를 상상한다. 그렇게 상상된 미래는 웰스, 베른, 헉슬리를 포함한 많은 작가들을 통해 구현되기도 했다. 그런데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쉽게 간과되곤 한다. 누군가에게 유토피아인 세계는 동시에 누군가에게 디스토피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간극은 주로 관계 정립의 양상으로 인해 발생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 인간과 기술 등 인간이 다른 인간 혹은 비인간 주체와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누군가는 배제되거나 객체로 전락한다. 즉 세계는 어떤 '본질적 속성'이 아닌 구성원 사이의 '관계적 특성'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우리는 관계적으로 상상하고, 상상적인 관계를 그려봄으로써 인간과 인간,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관계를 재구성해나갈 수 있다. 나는 이러한 '관계'가 미래에 대한 상상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폭력적이지 않은 관계를 상상할 때, 비로소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미래는 근대 휴머니즘의 배타적인 이분법과 정상-비정상 담론을 넘어선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 생각한다. 중요한 건, 모든 변화는 상상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내가 SF를 좋아하게 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우선 '관계적으로 상상한다'는 것은 지구를 하나의 연속체로 본다는 것이다. 우리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환상에 갇혀서는 누군가에 대한 타자화를 피할 수 없다. 즉 150년 후의 우리는 단일이 아닌 연속체로서 존재하며, 종을 넘나드는 연대와 공생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을 상상해야 할 것이다. 또 '상상적인 관계를 그린다'는 것은 미래의 관계 양상의 잠재성에 한계가 없음을 의미한다. 가령 정세랑의 SF 소설 <리셋>은 수많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모여 인간과 자연의 위계 구조를 뒤집어놓는다. 이처럼 열린 마음으로 모든 관계의 가능성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배타적인 폭력성에서 벗어나 창조적인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순간에도 복잡한 관계망의 일부로 살아가지만, 때때로 그러한 관계를 망각하고 살아간다. 그렇게 내가 아닌 '타자의 시선'이 사라지면 사람과 사람 사이, 종과 종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의 경계는 깊어진다. 자연을 외면하며 환경오염은 더욱 심각해졌고, 새로운 과학기술에 편승해 부를 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러한 진보에 대하여 배제되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우리가 이룬 발전을 유토피아로 느낄 존재와 디스토피아로 받아들일 존재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제 150년 후 우리는 타인과 자연을 포함한 더 넓은 범위의 주체성을 상상할 것이다.
그렇게 모두에게 이상적인 미래를 설정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곧 어떤 권력구조의 재정립으로 이해될 수 있다. 가령 개인 간의 관계를 시작으로, 동식물을 포함한 자연과의 관계,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기술과의 관계, 타 국가 혹은 집단과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150년 후에는 이 모두를 하나의 공동체로서 고려하고, 우리와 그들 모두 사이에 숨겨진 네트워크를 인식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연결될 수 있다. 이로써 행위 주체로 간주되지 못했던, 혹은 행위주체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대상들과의 공존이 가능해진다.
150년 후의 미래에는 인종, 생물종, 혹은 그 어떤 차이로 인해 배제되는 존재가 없을 것이라 상상한다. 소속이나 여타 불가역적이고 귀속적인 속성으로 인해 차별받는 사람도, 인간을 위해 폭력적으로 사육당하는 동물도 없고, 자연과 기술이 인간의 도구가 아닌 우리와 같은 하나의 구성물로써 이해되는 사회. 그러한 관계성을 상상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갈 것이다. 모두가 말도 안 된다며 비웃었던 베른의 소설 속 세계가 현실이 된 것처럼, 차별과 배제가 없는 사회를 상상하고 또 믿는다면, 우리의 상상에 조금은 더 가까워진 사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문학적 상상력의 힘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