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묵혀 둔 잔상
정호승 시인을 좋아하게 됐다. 그건 아마도 당신의 강의가 끝나자마자, 누구보다도 바로 옆 보조 책상에 앉아있는 나를 향해 고개 숙여 고맙다고 인사해준 그 순간부터일 것이다.
그날 정호승 시인은 강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을 깊어가는 가을에 만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그 이야기를, 한 해가 다 끝나가는 겨울이 되어서야 나는 쓰기 시작했다. 나는 이렇게 쓸 것들을 묵혀 두기를 좋아한다. 이 깊어가는 겨울에, 가을에 만난 한 시인의 이야기를 쓸 수 있어 기쁘다.
시인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강의를 시작했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과정에 사랑이 있다고 한다. 사랑이 시작되면 동시에 고통이 시작된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사랑을 하면 내게 사랑만 오는 것은 아니다. (한 대학 친구는 얼마 전 중앙도서관 앞에 붙인 대자보에, 사랑하므로 분노한다고 적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을 멈출 수 없다. 그렇담 삶은 고통의 과정이란 말인가. 하지만 우리는 그 고통을 기꺼이 감내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시인은 바람과 풍경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은 바람이 있기에 자신을 울릴 수 있고, 바람은 풍경이 울기에 바람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다. 나는 이 이야기가 참 마음에 들었다. 바람과 풍경은, 서로가 있음으로 하여 자기 자신의 가장 아름다울 소리를 울릴 수 있다.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아놓았다. 참 아름다운 구절이다. 그렇다면 나는 바람이 되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달아 놓은 풍경을 울게 할 수 있는. 나는 그의 풍경이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게 할 것이고, 그는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될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어했다는 걸, 시인의 그 구절을 통해 깨달았다.
또 시인은 당신이 쓴 시 중에서 가장 위안이 되는 시를 알려주었다. 제목은 ‘산산조각’인데, 흙으로 만든 부처님을 실수로 떨어뜨려 상심한 화자에게, 부처님이 ‘산산조각이 나면 /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 산산조각이 나면 /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하고 말씀하신다.
그러니 산산조각이 나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산산조각이 났는데 어떡하지, 하고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산산조각이 나면 나는 산산조각이 나지 않았다면 얻을 수 없었던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고, 산산조각이 나면 나는 산산조각이 나지 않았다면 살 수 없었던 산산조각을 살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정호승 시인이 우리에게 주고 간 마지막 교훈이었다.
시집에 사인을 해 달라는 나의 요청에,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볼펜을 꺼내는 시인의 모습을 기억한다. 당신의 강의가 끝나자마자, 그저 강의 보조일 뿐이었던 내게 가장 먼저 고개 숙여 고맙다고 인사해준 그 순간도.